손을 대자마자 폭풍 골골송을 불러주던 초동이 녀석은 그렇게 수감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동인 하루가 다르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오뎅꼬치로 시선을 빼앗은 후에야 엉덩이를 살살 만질 수 있던 것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오뎅꼬치가 없어도 쓰다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포획틀 문을 조금씩 열어주기 시작했고 또 며칠이 지나서는 잠깐씩 포획틀 밖으로 꺼내주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가 운동시간이 되어 마당으로 잠시 자유를 얻듯이 녀석은 그렇게 잠깐의 자유를 만끽하다가 다시 자신의 감방으로 수감되고는 했습니다.
아내는 가을이가 쓰던 쿠션을 같이 넣어주었는데 녀석은 자기 감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마치 쇼파에 기대어 쓰러질 듯 앉아있는 아저씨처럼 쿠션에 널브러져 있고는 했습니다. 이때 우리가 눈치가 좀 빨랐더라면 녀석이 중증의 왕자병에 걸리지 않게 조심했을 터인데 우리는 그저 녀석이 길에서 힘들게 사느라 생전 보지도 못한 쥐돌이만 보면 환장을 하고 무언가 깔고 앉을 것을 주기만 하면 일단 깔고 앉는가보다 하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녀석은 시간이 지나자 절대 맨바닥에 앉지 않고 뭐든 깔고 앉을 수 있는 게 있어야 착석하시는 고귀한 귀족냥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사태를 알지 못한 채 우리는 하루하루 녀석의 적응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포획틀에서 밖으로 외출하시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다가 거의 한달이 다 되었을 무렵에 녀석은 깜빵냥의 신분에서 우리집 둘째냥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동이가 그렇게 출소하게 되자 가끔씩 면회를 오던 가을냥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초동이를 쥐어잡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깜빵 앞에서 알짱대던 것은 초동이를 향한 관심이 아니라 녀석이 출소하기만을 벼르고 있었던 것이었나 봅니다. 일전에 초동이가 베란다에서 생활할 때에도 가을이가 가끔 베란다로 가 둘이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초동이가 구석이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았지만 가을이도 처음에는 호기심만 있던 탓이었는지 관심만 가졌지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동이를 구박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외동으로 자라온 탓이라 그런지 가을이는 초동이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가을이는 마치 신입생을 조용히 화장실로 끌고 가는 불량선배처럼 초동이를 따라다니며 구박하기 시작했고 초동이는 그렇게 출소를 하자마자 껌 좀 씹고 침 좀 뱉으시던 가을냥에게 쫓겨다니며 구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내심 동생을 이뻐하는 맏이처럼 가을이가 초동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뛰어 놀며 서로 그루밍도 해주고 붙어서 잠도 자는 사이좋은 남매로 지내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늘 놀아달라고 우리 부부만 쳐다보고 있는 가을이의 욕구를 초동이가 함께 놀아줌으로써 점점 늙어가는 우리의 육신이 조금 평안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허황된 꿈에 불과했고 녀석들은 함께 놀지 않고 도리어 두 녀석이 각자 우리와 놀아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두 배로 더 힘이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녀석들은 오늘날까지도 가까워진 듯 싶으면 데면데면하고 노는 듯하다 싸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동이의 수감생활이 마치던 그날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의 수감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냥이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