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나의 집
갓 20살이 되었을 때부터, 나는 글로 먹고살기 위해 카피라이터 꿈꿨지만, 현실을 직시할수록 내 꿈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다고 촌구석에서 계속 촌스럽게 살기는 정말 싫었다. 당시 나는 도시로 나아가지 않으면 꿈을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도시에서는 세련된 곳에서 우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상도 한몫했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말겠다는 막연한 패기가 생겼다. 사람들의 만류와 반대를 무릅쓰고, 꿈을 이루겠다는 거창한 다짐과 함께 상경했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서울에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살고있다.
<레이디버드>는 나고자란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으로 떠나고 싶은 10대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영화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살길 원하는 나와 반대하는 가족 간의 갈등을 들은 지인이 추천해준 영화다. <레이디버드> 속 여주인공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보다 스스로 지은 이름인 '레이디버드'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주저하지 않고 실행하는 흔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레디이버드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이 불편하면서도 재밌었다. 불편한 그녀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나의 욕망과 많이 닮아있었다. 환상과 꿈을 좇는 모습이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는 이토록 불편하고 불안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꿈을 찾는다 말하면서 정작 타인의 꿈을 바라보는 나는 너무 작은 마음이었다.
결국 뉴욕에 위치한 대학에 간 레이디버드에게 한 친구가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그녀는 거짓말로 "샌프란시스코"라고 답한다. 이 장면이 감독이 영화의 각본을 쓸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이라고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한 데서 오는 수치심의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사람들은 캘리포니아라고 하면 흔히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를 떠올린다고 한다. <레이디버드>의 배경인 새크라멘토는 캘리포니아주 한복판에 위치한 광활한 농업 지대의 북쪽 끝에 있는 도시이다. 캘리포니아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다른 도시에 대한 동경을 품게 만든 것이다.
레이디버드가 처음 운전을 하며 자신이 살아온 도시를 드라이브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넓은 들판과 그 곁을 지키는 호수의 풍경, 수없이 지나쳤던 동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떠나고싶은 곳이 아닌, 삶을 함께 한 새크라멘토를 그냐는 따뜻한 눈빛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장면보다 편안해보였다. 다른 장면이었지만, 그녀의 대학 진학 상담에서 교장선생님이 했던 대사가 함께 떠올랐다.
"넌 분명히 새크라멘토를 사랑해. 너의 글 속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어."
"네, 뭐, 관심은 갖고 있죠."
"그 둘이 같은 게 아닐까? 사랑과 관심"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의 고향을 묻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알려주기보다 주변에 위치한 알기 쉬운 도시의 이름을 대기 시작했다. 나의 고향이 부끄럽다거나 소개하기 꺼려진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내 고향이 어딘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고향은 단지 떠나고 싶은 답답한 곳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뉴욕에서의 일상을 꿈꾸며, 자신의 이름마저 새롭게 지어 자신을 정의하고자 했던, 끊임없는 새로운 환경을 갈망했던 레이디버드에서 내가 보였던 이유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게 되는 날, 그토록 지겨워서 떠나고 싶었던 고향을 마음껏 달리는 상상을 해본다. 마당이 곧 바다였고, 뒤뜰이 곧 울창한 산이 었던 어린 시절 나의 고향, 나의 집. 그 때 고향을 바라보는 나의 눈도 그녀터럼 가득 찰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