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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Jan 16. 2021

흐릿한 나의 삶이여, 뚜렷이 먹물을 토해내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문어 선생님> 리뷰

근 1년 간의 삶은, 꼭 지루하면서도 시간만 질질 끄는 삼류 드라마같이 흘러갔다.


기승전결도 반짝거리는 사건도 없었고, ‘이때쯤이면..’ 하는 모든 기대감은 매번 빠짐없이 외면당했다. 실제로 이런 드라마가 있지는 않아서 참 다행이다. 지나친 사실주의와 ‘고구마 전개’로 인해 욕깨나 먹었을 텐데. 뭐, 개인적으로만 본다면야 나쁘지는 않은 삶이었다. 다만 지난 1년이 내 자서전 속 생애 연표에 기재될 만한 시간이었나 묻는다면 고개가 가로저어질 뿐이다.


그 와중에도 매일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한다든가, 새로운 취미나 사업에 도전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있다는 것이 묘하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극하고 채찍질해나가는 사람들이 여간내기가 아님을 잘 아는 나이가 돼어설까. 직장인이 된 이후의 내 삶은, 세상이 만들어내는 것들을 가만히 앉아 듣거나 보는 것에 가까웠다. 손을 뻗어 만지고 만들고 소리 내고 보여주는 삶은 어느새 개인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면면이다.


그러다 보니 삶의 ‘촉수’가 자꾸만 움츠러들어 케케묵은 먼지 속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작은 위기에도 으레 포기의 흰 수건을 날리기 마련이고, 매일 샘솟는 하루의 시간들에 무감각해져 아침 해를 보며 탄성을 지르지 못한다. 그저 모든 것이 당연해 보이고,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마침내는 인기를 끄는 영화나 드라마조차도 끝까지 감상해내지 못하는, 수동적인 단계를 넘어서 감각의 아나키스트가 되어버렸다.



문어는 2800여 개의 빨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냥 빨판도 아니다.

인간의 손가락처럼 하나하나 감각을 곤두세워 움직일 수 있는 2800여 개의 손가락인 셈이다.


문어의 빨판은 빨판 그 이상의 존재로 나에게 다가온다. 아무리 양손가락 양 발가락을 펼쳐 흘러가는 하루를 더듬거린다고 해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총량은 문어의 70분의 1 정도에 그칠 뿐이다. 게다가, 해보면 분명히 알겠지만, 양손 양발을 동시에 이리저리 꼼지락 거리는 일조차 짐짓 어려운 일이었다. 내 몸에 붙은 20개 남짓한 ‘가락’들조차 내 맘대로 기동 할 수 없다니. 발 끝에 붙어 잘도 내 영양소를 공급받는, 그럼에도 내 의지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는 퉁퉁한 새끼발가락이 얄궂고, 그를 노려보는 내 모습은 되려 처연하다.


결국 선생님이라는 존칭 명사가 붙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문어라는 생명체는. 


결코 빨판의 개수 때문만이 아니다. <나의 문어 선생님> 속에는 이름 모를 문어 아가씨의 삶이 1시간 30분도 채 안 되는 필름에 농축돼서 담겨있다. 그녀의 지적 능력과 친화력, 유연하다 못해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신체, 삶을 받아들이는 숭고한 태도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영화를 보는 와중에 몇 번이고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각에 문어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퍽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내가 목격하지 않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왔던 것 같다.


최고의 지능을 가졌다는 인간임에도, 지구라는 행성에 같이 빌붙어 살고 있는 생명들에 대해 아는 것도 관심도 걱정도 없었다. 문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다리가 8개라는 것뿐. 그렇기에 문어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커다란 미지의 세계에 쿵! 하고 부딪힌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고 전신이 진동하듯 울렸다.


자신을 매일 보러 와주는 인간에게 먼저 내미는 악수.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잃지 않는 침착함과 이성적인 전략. 작은 물고기 떼들과 치는 짓궂은 장난. 다리 하나를 뜯긴 무거운 손실조차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키워내는 생명력. 살기 위해 행하는 모든 발버둥. 먹물.


무엇보다 나의 지난 1년보다도

훨씬 뚜렷하고, 다채롭고, 밀도 있는, 문어의 1년.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고 나니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고리타분한 비평가가 삶이라는 작품을 냉철한 이성으로만 분석해버린 비평론 같다. 삶에 대한 희미한 무관심의 향기마저 느껴진다. 삶을 비극이니 뭐니 성급하게 판단해버린 그 '가까움'은 결코 충분한 가까움은 아니었으리라. 더욱 가까워지고 가까워져서, 삶의 너른 가슴에 파묻히고 녹아들어 결국 삶 속에 존재할 때, 더 이상 삶은 비극도 희극도 아닌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길'이 된다.


그리고 문어야 말로 그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자신을 렌즈 너머에서 지켜보는 카메라 감독과 차가운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보게 될 관객들에게 보란 듯이 삶을 걸어냈다. 물론 (나처럼) 흐물거리는 몸짓으로 흐릿한 발자국을 남기는 종류의 걸음은 아니었다.


삶의 시계 초침을 매 순간 직접 밀어내는 것처럼,

순간만을 100%로 살아가는 위엄 있는 발걸음이었다. 



그 발걸음은, 살기 위해 조개로 몸을 감싼 채 느꼈을 긴장이 되기도 하고 실족의 아픔을 견뎌내던 창백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사람에게 내미는 수줍은 발걸음이 되기도 하고 사냥을 위해 펼치는 명쾌한 지략이 되기도 했다. 마침내는 다른 물고기들의 저녁거리가 되기 위해 걷는 죽음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 허투루 걷는 법이 없었다. 2800개의 빨판으로 느끼고 만지고 만들며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해냈을 뿐이다. 만약 죽기 직전에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결코 걱정도 후회도 없는 삶을 살아냈다며 울림 있는 한 마디를 남겨줬을 테다.


상어에게 토해냈던 먹물처럼 명징했던 문어의 삶. 


나도 무언가를 토해내는 1년을 보낼 수 있을까.

2800개는 안되더라도 촉수 10개쯤은 세워두는 예리한 1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문어 선생님도 모를 일이다.



우리 집에는 뭉치라는 강아지 아들이 하나 있다. 뭉치의 삶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며, 태산 같은 흙더미 속에서도 항상 치킨 뼈나 갈비뼈를 틀림없이 찾아내는 모습이라든가, 농장에서 목줄 없이 밭의 여기서 저기까지 쏜살같이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에도 녀석은 분명 나보다 뚜렷하다.

잠들 때조차 잡생각이 덕지덕지 묻은 채 잠을 청하다가 얼마 못가 흐릿한 상태로 어영부영 깨어나는 나로서는, 잠에도 먹을 것에도 한껏 빠져있는 뭉치가 나아 보인다.



도대체가 인간이 어쩌다 이 지구를 쥐락펴락하게 된 것인지 당최 모를 일이다. 어쩌다 얻은 지능을 온 지구에 보란 듯이 악용해서라도 그 권위를 보여주고 싶은 걸까. 원래 먹이사슬 상위의 맹수일수록 (배고프지만 않다면) 너그럽고 조용한 법인데. 아직 인류는 갈 길이 멀었다. 그 먼 길조차도 지구가 가만히 허락할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뭉치 선생님, 가르침을 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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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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