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리야 안녕?
우리 부부는 결혼 3년 차로 접어드는 시점에 아기를 가져볼까 하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됐다.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와, 아이라고는 조카만 좋아하는 남편이었기에 그다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기를 가져보려고 했던 이유도 '우리 아기를 너무 갖고 싶다' 라기보다는, '어차피 가질 거면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게다가 코로나 시국으로 재택 하고 집콕해야 하는 이 시기에 갖자'에 가까웠다.
아 참, 아기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이 어쩌다 아기를 가질 생각을 했냐고 많이 물어봤는데, 사실 결혼 때(무슨 용기였는지) 큰 고민도 기대도 계획도 없었음에도 그럭저럭 재밌게 잘 살고 있어서 그런지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별 고민이나 생각이 없었다. 내 인생이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흘러와서 '뭐 잘 되겠거니' 하는 마음이었겠지. 못 고치는 습관이나 마찬가지다. 의외로 생각 없이 지르는 일들이 삶을 재밌고 유익하게 만든 경험이 많았기에 가진 근자감이랄까.
임신 고사: 임신은 두 명이 같이 보는 하나의 시험과 같았다
아무튼 슬슬 시도나 해볼까 싶은 시점부터 엽산을 찔끔찔끔 먹었고 나머지 일상생활은 지속했다. 술도 먹고 운동도 격하게 하고 먹는 것도 가리지 않았다. 다만 임신한 다른 친구의 추천에 따라 배란테스트기를 사용했다. 나의 경우는 한 번 마음먹으면 확실히 일을 끝내는(?) 것을 선호해서 그런지 배란테스트기가 너무나 유용하고 고마운 아이템이었다.
그렇게 시도를 한 후 며칠이 지나고서부터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삼사 주만 기다리면 확실해질 임신 여부에 마음이 졸이기 시작했다. 맘카페에서는 '증상놀이'라고 불리는 것도 경험했다. 괜히 어지러운 것 같고 괜히 배가 콕콕 쑤시는 것 같고(착상통인가?라는)...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쓸 몸의 작은 감각들에 괜히 신경이 쏠렸다. 임신 여부를 알기까지의 시간들이 너무 무료하고 기대되고 걱정됐다. 가채점도 못해보는 시험을 치르고 성적표를 기다리는 느낌과 비슷하다면 비슷하겠다.
결국 각종 임신테스트기를 종류별로 섭렵하며 테스트 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수정 후 10일~14일은 되어야 두 줄이 보일락 말락 하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진한 두 줄을 보기까지는 거의 영겁의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나의 경우 괜히 미리 체크해봤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일주일은 꾹 참았다. 하지만 끝내 못참고 얼리임테기(별 게 다있다)로 테스트한 후 단호박 먹고 크게 실망했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정작 테스트기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마치 중요한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것처럼 속상했다. 매 달 한 번밖에 오지 않는 기회이기 때문에 마음도 촉박해졌다.
그렇게 혼자 '이번 달은 아닌가 보다' 하며 마음을 접었다가도 다음 날 아침에 또 테스트기를 집어 든 지 며칠. 드디어 수정 10일쯤부터 임신테스트기에서 희미한 두 줄을 보기 시작했다.
거의 매직아이 수준인 테스트기 사진을 조도를 수정해보면서까지 확인해봤고 아무리 봐도 두 줄 같았더랬다. 카페에도 '이거 두 줄 맞죠???'라며 사진을 올려보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렇게라도 확신을 얻고 싶었다. 지난 며칠 간의 패배감이 이루 말도 못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테스트기는 점점 진해지기 시작한다. 신기한 점은, 임신 호르몬이 약 이틀을 주기로 두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진하기 역시 이틀 단위로 업그레이드된다.
남편에게는 사실 바로 알리지 않았다. 극초기의 얇은 두 줄로 괜히 호들갑 떨다가 테스트기 오류였다 거나 하면 괜히 민망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진해졌던 수정 13일째 쯤 남편에게 테스트기를 보여줬고 우리는 환호하며 서로 껴안았다. 나만 눈물 찔끔한 건 안비밀.
드디어 임신 고사 합격!
임신 확인까지의 긴긴 나날
물론 여기서 끝은 아니다. 임신테스트기는 테스트기일 뿐 실제 임신 확정은 산부인과를 가봐야 하는데, 산부인과에서는 아기집이 보이고 심장이 뛰어야 임신확인서를 써준다. 그러려면 최소한 임신 6주는 지나야 확인이 가능하다.
임신 주수는 수정일 기준이 아니고 이전 생리 시작일이 기준이기 때문에, 엄연히는 수정되는 순간이 임신 2주쯤 된다. 보통 임신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시점은 생리를 했어야 하는데 안 한 시점 즉 임신 4주쯤이다. 주수 계산이 참 골치 아프다. 그리고 임신, 출산에 관한 모든 기간 계산은 '만'으로 계산한다. 즉 7일이 지나야 임신 1주다.
또한 임신 극초기에는 임신테스트기 두 줄을 확실히 봤더라도 화유(화학적 유산)이나 계유(계류 유산)로 다시 임신테스트기 두 줄이 연해지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임신 초기에 임신 소식을 주변에 알리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괜히 알렸다가 유산이라도 겪으면 유산의 슬픔과 함께 주변의 시선까지 감당해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역시 부모님들에게도 임신 사신을 늦게 알릴까 했지만, 하필 있었던 설 명절이 임신 7주쯤이어서 임신 확인서를 받은 후 양가에 알리기로 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임밍아웃카드'도 주문하고 매일 임신테스트기를 계속하며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행히도 우리 꾸리(태명)는 0.5cm로 아기집도 잘 지어져 있고, 몸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몸에 심장이 먼저 생겨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다른 엄마 아빠들은 임신 확인 초음파 때 울기도 한다는데, 기대치 않게 빠른 임신을 했던 초보 엄마 아빠인 우리는 그저 얼떨떨함과 신기함으로 헤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며칠 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나의 부모님, 남편의 부모님에게 알릴 생각에 두근거리기도 했다.
잦은 피 비침
그런데, 설 명절 당일 아침에 피 비침이 생기고 말았다. 원래 임신 초기에 착상혈로 피 비침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가장 기다리고 중요한 임밍아웃의 날 아침이고, 원래는 일찍 시댁으로 출발하려고 했으나 피 비침이 있는 상태에서 그저 기쁜 마음으로 부모님들께 임신 소식을 알리기는 너무 두려웠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들께 내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급히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산부인과에 가서 아기 심장이 다시 잘 뛰고 있는 걸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고 기쁘게 임신 소식을 부모님들께 전했다. 결국 엄마 아빠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다가 멀쩡한 부모님과 달리 울어버렸던 나다...
이후에도 사실 피 비침이 몇 번씩 있었고, 임밍아웃 한 달 뒤에 있었던 내 생일 즘에는 여행 갔던 경주에서 꽤나 심한 피 비침이 있어서 급히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다가 할아버지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꾸리는 6주의 0.5센티에서 8주엔 2센티로, 10주엔 3.5센티로 매 검진 때마다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재택근무 덕에 스트레스도 덜 받으며 비교적 편안한 임신 극초기를 보냈다.
글 쓴다고 임신 초기 때의 앨범을 한참 뒤적였다. 불과 1년 전임에도, 나도 남편도 젊었음은 물론이고, 초음파 사진을 보니 우리 꾸리가 정말 작디작은 존재였음이 놀랍다. 물론 세상에 태어난 지금도 하루하루 많이 다르긴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매일 설렘과 두려움이 회오리치는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매주 쑥쑥 커가는 꾸리를 보면서 뱃속에 이런 작은 존재가 심장을 콩닥콩닥 뛰어가며 살아있다는 사실에 참 경이롭고 감사했다.
임신했을 때 자주 듣던 말이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가 좋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와서 내 앞에서 나와 눈 마주치며 웃어주는 아기가 아직은 너무 사랑스럽고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게, 아기와 내가 24시간 함께 한다는 그 느낌이 그립기도 하다. 나와 아기가 하나였던 그 순간들이 힘든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따뜻하고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러다 둘째가 생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