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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Feb 01. 2021

드라마의 욕망과 무대의 윤리학

연극 <인방갤>(2019년 8월 16일~25일) 

공연일시 2019년 8월 24일

공연장소 대학로 노을소극장

작/연출 이승원

출연 김용준 김권후 김선미 김애진 외      

    



인터넷보이지 않는 무대 


  그곳에 인터넷이 있었다. 연극 <인방갤>은 한국 사회에서 주된 미디어로 부상한 인터넷 방송을 다루고 있다. 본래 디시인사이드 인터넷방송갤러리를 뜻하는 줄임말인 인방갤은 극단 나베에 의해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인방갤>은 BJ(인터넷방송진핸자)들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방송 콘텐츠와 웹캠 뒤에 펼쳐진 다양한 군상들을 무대로 옮겨왔다. 무대 위의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매개로 관객들은 인방을 시청하듯 연극을 관람하고 연기자들은 BJ가 되어 시청자들을 근거리에서 마주하게 된다. 인터넷이라는 무형의 선(Wireless)으로 연결된 관계들이 <인방갤>을 통해 실체화된 무대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BJ와 시청자로 상정된 관계들을 유형의 무대로 이동시켜 인방에서 볼 수 없는 숨겨진 풍경을 가시화했다는 것은 <인방갤>이 가진 오롯한 미덕일 것이다. 

  연극이 일관적으로 유지하는 시선처럼 인방은 방송자와 시청자가 일대일로 접속하는 새로운 시대의 미디어다. 연극이나 영화가 공유하는 관극의 체험은 물론 TV가 제공하는 동시대의 집단 시청 체험 역시 인터넷에서는 소멸한다. 반면 개인의 취향을 극단적으로 충족시키는 콘텐츠는 인방들 사이에서 범람한다. 같은 콘텐츠라도 BJ에 따라서 다양한 서사들로 갈라진다. 시청자들은 개별화된 수많은 서사들 속에서 자신의 취향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이처럼 인방을 구축하는 가장 주된 요소는 ‘욕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무제한적으로 접하는 기회, 어떠한 시간적·공간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제공받을 권리가 이 연극을 관통하는 메시지이다. On Demand가 아닌 Streaming에의 접속은 인방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접근하는 키워드가 된다. 접속을 주조하는 실체화된 욕망은 미디어를 읽어내는 구조에 대한 해답에 가깝다. 실제로 <인방갤>은 인방을 둘러싼 BJ와 시청자의 욕망의 교환을 매개로 한 세계다. 별사탕을 얻기 위한, 혹은 내가 원하는 콘텐츠의 극한을 보기 위한 욕망의 교환,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인방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그렇게 보자면 <인방갤>은 욕망을 매개로 무형의 관계를 무대의 안과 밖을 연결시키는 연극이다. 배우가 BJ를 연기하듯 관객은 시청자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무대를 덮고 있는 제4의 벽이 모니터로 화하는 순간 관객은 시청자가 되어 익명의 목소리를 분출하는 불특정 다수를 연기하게 된다. 모니터의 사이로 떠다니는 익명화된 텍스트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유저의 목소리이고 하지만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성이 무대 위에서 성립될 때 <인방갤>은 일종의 연갤(연극갤러리)이라는 메타화된 미디어를 재현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외로움을 디스플레이하는 존재


  <인방갤>에 등장하는 BJ들은 다양한 분야를 막론하고 콘텐츠를 생산하는 인물들로 상정되어 있다. 자극적인 발언과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방 대통령으로 불리는 철호를 중심으로 애국보수의 수호자 육만원, 한물간 섹시 BJ 미라, 벗방을 진행하는 밀크, 인기 없는 하꼬 게임 BJ 순봉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애찡, 이제 인방을 시작한 트랜스젠더 프림까지 다양한 BJ들이 진행하는 방송은 순차적으로 무대에서 연기된다. 

  소통과 소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벌이는 BJ들은 무대라는 모니터를 통해 디스플레이된다. 별도의 모니터가 무대 위에 구비되지 않은 것은 제4의 벽이 곧 모니터라는 <인방갤>의 전략이다. 현실에서 아프리카TV, 유튜브, 트위치 등의 플랫폼이 수많은 인방러(인방을 진행하는 사람)들을 전시하듯, <인방갤>은 무대라는 모니터를 통해 BJ들은 디스플레이한다. 관객들은 PC와 스마트폰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이들의 방송을 선택해서 볼 수는 없지만 이들이 제공하는 콘텐츠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자신의 병을 인증하는 미라와 결혼생활을 생중계하는 철호는 사생활을 매개로 극단적인 소통을 시도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신념을 콘텐츠화시켜 돈을 버는 육만원과 애찡이 있고 소소한 취미 방송을 진행하는 순봉과 프림은 물론 돈을 위해 옷을 벗고 선정적인 춤을 추는 밀크까지 이들은 소통이라는 목적을 내세워 소비를 유도한다. 

  때문에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소통과 소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인간에 집중되어 있다. 웹캠을 통해 투사되는 BJ라는 이미지가 무대 위에 전시될 때 역설적으로 그 이면에 놓인 진실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다. 웹캠을 통해 생중계되는 이들의 메시지는 진실인가. <인방갤>이 130분의 상영시간동안 집중하는 것은 화면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일관성이다. 우리가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전시화된 이미지는 특정한 극적 구성을 가지게 된다. 1인극이 재연되듯 BJ들이 진행하는 방송은 극을 구성하는 주된 서사인데 더 정확히는 시청자의 별사탕 도네이션을 받기위해 이들이 벌이는 특정한 행동들이 극의 전부이다. 이를 위해 미션, 합방, 섹시댄스 등의 콘텐츠는 그 자체로 극적 장치인 셈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들의 눈앞에서 재연되는 순간에도 BJ들을 둘러싼 시청자의 시선은 멈추지 않는다. 이들의 뒤를 떠돌아다니는 음성화된 텍스트들은 보이지 않는 시청자의 목소리인 동시에 관객들의 목소리가 된다. 이들은 모니터라는 보이지 않는 무대를 설정하여 이 안에서 경제적인 구조를 구축하려 한다. 때문에 이들이 별사탕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은 삶을 걸고 벌이는 일종의 도박이라는 인방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 

  몇 백, 몇 천, 몇 만의 시청자가 모두 하나의 화면을 보고 있을 때 그것은 과연 진짜(Real)인가. <인방갤>이 다다른 대답은 가난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웹으로 자신을 송출하는 BJ들의 행위를 무대 위로 전시한다. 외로움 때문이라는 프림의 말처럼 이들은 매일 밤 수천, 수만의 사람들과 소통을 나누지만 정작 오프라인에서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한다. 욕설과 음담패설에 찌들어버린 이들은 몸과 마음의 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은 모니터를 넘어 무대 위로 오롯이 전달된다.      



확장되지 못한 드라마()


  연극이 상영되는 동안, 철호와 다른 BJ들은 별사탕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진다. 합방을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감행하고 사생활을 포기하는 BJ들의 모습은 전세계로 송출되는데 이들에게 노출은 곧 수익을 의미한다. 철호의 집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술합방 장면은 <인방갤>이 인방의 핵심적인 윤리를 겨누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일본노래를 부르다 취해 잠든 육만원을 배경으로 BJ들에게 커다란 전환의 순간이 다다른다. 철호의 과거와 얽힌 BJ들이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웹캠을 통해 생중계되고 이 과정에서 인방대통령 철호의 지저분한 과거 역시 노출된다. 웹캠을 통해 24시간 송출되는 라이브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이들 역시 외로움을 가진 비루한 인간이라는 사실이고 이는 <인방갤>이 인방시대의 BJ들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연극이 원작처럼 활용하고 있는 아프리카TV는 성희롱, 일반인 비하, 스캔들 등 다양한 사고가 끊임없이 터지고 있다. <인방갤>이 인방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BJ들이 혼란스러운 쾌락의 현장에서 별사탕을 얻기 위해 벌이는 행동들을 자극적인 언어와 몸짓으로 보여주는 것은 <인방갤>이 애초에 이들에게 윤리적인 기준을 설정해놓았다는 증거다. “씨발. 좆같애서 안해.” 라고 외치면서도 별사탕의 배팅에 삶을 던지는 철호의 마지막 모습은 모니터 안의 세계가 구조적인 모순에 봉착해있음을 나타내는 <인방갤>의 해석과 결론인 셈이다. 

  <인방갤>이 놓치고 있는 진실이 있다면 BJ들의 삶을 구성하는 웹이라는 플랫폼 특유의 밀도일 것이다. 기존의 미디어와 달리 웹은 개개인의 만족을 위해 최적화된 형태로 흩어진 콘텐츠를 제공한다. 요컨대 웹이라는 플랫폼 안에서 욕망은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가 모니터(무대)를 매개로 허물어지고 시청자(관객)의 욕망 역시 함께 미끄러지며 실시간으로 서로를 상호참조하며 끊임없이 확장된 형태의 드라마를 제공한다. 그렇게 보자면 <인방갤>이 설정한 고정된 UI(User Interface)는 무대라는 벽을 허물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기초로 하는 인방의 특성상 시청자의 욕망은 끊임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변해가며 전달된다. 웹은 이 욕망을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거스르며 욕망의 만족을 위해 극한으로 콘텐츠를 몰고 가는 것이다. 

  따라서 <인방갤>이 기준점으로 삼은 윤리적 태도는 끊임없이 유동하며 이동하는 인방의 윤리를 자칫 고정적이고 정해진 것으로 귀속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다루고 있다면 이에 대한 시선 역시 달라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인방갤>이 무대가 가진 고정성을 극복하기에는 여전히 요원하다고 볼 수 있다. 

  텔레비전과 영화를 미디어의 변방으로 몰아낸 인방은 현실의 윤리가 실상 모순과 역설로 이루어져 있다는 시청자들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생산된 콘텐츠, 소비하는 시청자, 이 사이를 매개하는 도네이션(화폐)는 웹이라는 세계를 이루는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선명한 규칙이다. 이 교환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내가 나를, 혹은 당신의 욕망을 가장 정직하게 공유하자는 공모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방의 윤리는 이 모순과 역설을 더 이상 숨기지 말자는 속물들의 자기고백과 가깝다. 반면 <인방갤>은 BJ들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순간의 쾌락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외로운 존재라는 윤리학적 해석을 견지한다. 고정된 윤리적 선(Line)은 모니터의 안과 밖을 모두 아우르는 인간에 대한 해석으로 승화될 여지는 있지만 계속해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새로운 시대의 윤리학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방의 시대다. 영화와 텔레비전이 미디어의 주도권을 서서히 잃어가는 사이 유튜브를 비롯한 스트리밍의 시대가 도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방을 통해 콘텐츠를 만들기 원하고 돈을 벌기를 원한다. 소통이라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있지만 소비의 중심에 서서 자신을 베팅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은 쉽다. 

  새로운 세계는 이미 도착했다. 드라마라는 고유의 예술양식이 이 새로운 세계를 매개하는 방법이 늘 무대가 꿈꾸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판단은 섣부르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어 웹으로 전이하며 끊임없이 확장하는 드라마가 다시 무대로 돌아올 때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직면해야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드라마는 여기서부터 다시 쓰여질 것이다.      



이 글은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 75호(2019년 가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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