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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May 12. 2021

‘없음’으로 구축된 드라마월드, 김순옥의 <펜트하우스>

혼돈의 기록


  “막장, 복수, 자극, 폭력, 선정성” 김순옥은 늘 한결같았다. 임성한의 후계자라고 불리던 그가 막장의 최전선에 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만큼 한국 드라마는 많은 굴곡을 겪어왔다. 50여년 동안 안방극장을 지키던 지상파 채널은 쇠락하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막장드라마는 빠르게 몰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귀환한 김순옥의 세계는 더욱 커졌으며 더욱 빨라졌다. 수많은 막장의 대모들이 소리없이 사라질 때도 끝까지 막장을 지켰던 김순옥은 202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점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막장이라는 한국 특유의 장르적 지평이 구축되기까지 김순옥의 이름이 지닌 무게는 결코 가볍지않다. 기억해야할 것은 김순옥이 창조한 가상세계가 현실과 드라마를 오가며 수많은 참조점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SKY캐슬>(JTBC, 2018~2019)이 의과대학으로 대변했던 계급사회의 잔영을 <펜트하우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부동산이라는 속물적 욕망을 김순옥은 서울의 중심 삼성동,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헤라 팰리스로 구현해낸다. 수직으로 정렬된 한국 사회를 직접적으로 현시하는 고층빌딩에서 원주민들은 연극적으로 삶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도저히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펜트하우스의 공간 속에서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유지하는 상류층의 삶을 드라마로 전시하는 김순옥의 전략은 막장 특유의 단절된 세계를 한층 넓혀가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김순옥의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단연 ‘없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빈 공간, 분명 존재하지만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을 드라마화시키는 김순옥의 탁월한 필력은 막장의 장르적 지평을 아득히 확장시켰다. 폭력과 복수, 음모로 가득 찬 막장의 세계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인물들에게 공정한 기회는 사치에 가깝다. 이 공백을 기어코 드라마화해내는 김순옥의 힘은 TV의 종언이 눈 앞으로 다가온 지금 그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K-드라마월드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헤라 팰리스의 인물들이 벌이는 생존게임이야말로 <펜트하우스>가 가진 미덕이다. 최소한의 현실성과 합리성조차 결여된 채 오로지 즉각적인 감정을 반복적으로 배설하는 김순옥월드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조차 희미해진 이 생존의 공간이야말로 막장이 한국사회에 되묻는 윤리적 질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재능을 거래하는 아이들


  “나도 나를 지켜야 할 것 같아서...”

  김순옥이 <펜트하우스>를 통해 창조해낸 세계는 <SKY캐슬>과 상당부분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드라마에서 어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계속해서 사회의 상층부로 밀어낸다. 의과대학에서 예술고등학교로 무대가 바뀌었을 뿐 권력의 수직관계에서 나오는 파열음이 드라마의 주 테마라는 점은 변함없다. 오히려 예술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지탱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펜트하우스>는 <SKY캐슬>보다 한층 더 깊게 나아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헤라 팰리스의 아이들은 자신의 재능과 사회에서의 성공이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오히려 이 사회의 시스템이 자신들을 공고한 위치에 놓아줄 것을 의심치 않는다. 때문에 헤라 팰리스의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본과 권력을 지키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헤라 팰리스의 자식들이자 동업자이다. 이들에게 팰리스의 외부 배로나(김현수)와 민설아(조수민)는 폭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일 따름이다. 이들에 대한 폭력과 괴롭힘은 팰리스의 일상이며 아이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해야만 하는 생존기술이다.  

  문제가 있다면 어른들과 구분되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가 정신적 외상(Trauma)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서진(김소연)의 기대를 이루어낼 재능이 없는 은별(최예빈), 단태의 학대에 노출된 석훈(김영대)과 석경(한지현)은 타인과 정상적인 관계맺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애초에 성장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아이들은 자본과 권력을 얻는 방법이 인간적인 성장과 관계맺기에 기반하고 있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해낸다.

  이런 현상은 헤라 팰리스의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배로나와 민설아에게 재능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게 해줄 무기에 가깝다. 자신의 재능을 지키는 것이 곧 초고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고 있던 배로나와 민설아는 이 재능을 두고 팰리스의 아이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한편 어른들과 거래를 시도한다. 배로나와 민설아에게 부모의 안위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팰리스에 입성하게 만들어줄 재능뿐이다.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재능을 무기삼아 팰리스의 어른들과 거래를 시도하는 아이들은 비로소 어른들과 동등한 동업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펜트하우스>의 아이들이 벌이는 위험한 거래는 <인간수업>(Netflix, 2020)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친구들을 쾌락과 위험으로 몰아넣었던 지수(김동희)와 규리(박주현)를 떠올리게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현실에서 자신의 재능과 자본을 어른들과 거래하는 아이들의 출현은 지금 여기에서 정의를 묻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성장없는 어른들의 놀이


  “증거가 있어야 죄가 있는 거니?” 

  죄책감과 양심에서 자유로운 아이들에게 용기를 복돋는 존재는 단연 팰리스의 어른들이다. 자신을 위해 완벽하게 세팅된 세계를 쌓아가는 주단태(엄기준)과 천서희(김소연)부터 펜트하우스의 질서에 스스로를 위탁한 이규진(봉태규)과 하윤철(윤종훈)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본과 권력이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 한다. 

  이들에게 삶은 놀이다. 부동산 투자도, 결혼도, 살인도 이들에게는 그저 삶의 무료함을 달래줄 이벤트에 가깝다. 팰리스의 세 남자가 마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듯한 시퀀스의 반복은 투기와 범죄조차 이들에게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재미있는 놀이에 가깝다. 배로나를 지키기 위한 윤희(유진)의 몸부림도, 이사장이 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천서진도, 아이를 잃은 수련(이지아)의 복수도 끊임없이 반전을 만들기 위해 반복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놀이와 한없이 가까워진다. 

  <펜트하우스>에 살아가는 어른들의 사랑과 복수에 관한 놀이적 구성은 김순옥월드를 구성하는 핵심과도 같다. 이 세계에서 어른들은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거나 성숙함을 내세우지 않는다. 민설아가 헤라상에 추락하여 사망하던 날 우스꽝스러운 파티복을 입고 연극하듯 시체를 처리하는 어른들은 성장을 거부한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보일 뿐이다. <펜트하우스>가 비정상적일정도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면에는 시청자들 역시 이들의 과장되고 희화화된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김순옥이 설계한 ‘놀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순옥이 구축하고 시청자들이 지탱하던 팰리스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믿음은 순진하다. 비밀과 반전, 죽음과 부활이 무작위하게 뒤섞이며 혼란 속으로 달려가는 <펜트하우스>는 당연하게도 장르적 한계에서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의미없는 거래와 놀이를 반복하던 <펜트하우스>가 시즌2에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청자들의 피드백에 직면하게 된 것도 자극과 선정성만으로 이 세계의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아내의 유혹>에서부터 공고하게 유지되어온 김순옥월드는 늘 그렇듯이 복수와 처벌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자신을 지켜왔다. 김순옥이 그토록 지켜오던 막장의 세계는 TV의 종말을 눈 앞에 둔 2021년의 한국에서 자극적일지언정 새로운 콘텐츠가 되기에는 어렵다. 그가 드라마의 전통적인 작법을 파격적으로 붕괴시키면서 일구어낸 세계는 유희의 반복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남기지 않고 스스로 생성과 붕괴를 반복할 뿐이다. 때문에 이 자기파괴적인 세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만큼 순진한 믿음은 또 없을 것이다.



* 이 글은 Rolling Stone Korea 창간호(2021)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rollingstone.co.kr/modules/catalogue/cg_view.html?cc=101111&p=1&no=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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