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캐슬>과 <킹덤>
텔레비전의 시대는 끝났다. 텔레비전의 점유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며 새로운 경험을 충족시켜주는 대중예술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드라마 역시 텔레비전과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상파 드라마의 시청률이 10%를 넘는 것조차 벅찬 시대에 텔레비전드라마는 옛 향수를 자극하는 올드 미디어의 기성제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르 드라마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대응책으로 보인다. 최근 한국 드라마에 빠지지 않는 추리는 드라마가 현실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처럼 보인다. 올드한 스타일의 지상파드라마에 피로감과 함께 장르 드라마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는 또 다른 이유는 추리, 스릴러, 공포 등의 장르는 일상과는 다른 기분을 촉발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사랑으로 현실을 해석할 수 없다는 불신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장르는 현실 앞에 선 인간을 그려내는 새로운 방법이다.
<SKY캐슬>과 <킹덤>은 드라마가 텔레비전의 외부에서 어떻게 생존에 성공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입시와 좀비라는 생소한 소재는 이전에 텔레비전이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인간의 ‘얼굴’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한국 드라마가 미처 그려내지 못한 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다. 이야기를 좀 더 진전시킨다면 지금 여기 한국에서 생존하는 법에 대한 나름의 합리적인 설명으로써 장르적인 것이 통용된다고 볼 수 있다. 비일상적인 세계에서 드라마가 포착한 인간의 얼굴은 욕망을 나타내는 가장 적실한 미디어다. 선과 악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의 내면, <SKY캐슬>과 <킹덤> 속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각기 다른 욕망의 얼굴들은 한국 드라마가 미처 닿지 못한 ‘표정’일 것이다.
거짓, 인간의 가장 진실된 표정
<SKY캐슬>은 고급주거단지 스카이캐슬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그린 드라마다. 이 드라마가 처음 주목을 받은 것은 사교육 광풍에 놓인 한국 교육의 현실을 블랙 코미디로 그려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전교 1등, 순혈주의, 입시코디네이터 등 공교육의 몰락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류층의 정상적인 행동은 한국이 이토록 견고한 성들로 축조되어 있다는 것을 드라마적으로 구성해 냈다.
하지만 <SKY캐슬>은 이 욕망이 실은 거짓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어코 카메라에 담아내는데 성공한다. 김주영을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카메라를 통해 분절된다. 거짓을 말하는 입과 진실을 감추지 못하는 눈, 불안함에 멈추지 않는 손이 카메라를 통해 응시될 때 몸은 다중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미디어가 된다.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들은 하나의 얼굴 속에서 충돌하고 병합된다. 아이들과 달리 끝없이 분절되어 서로 다른 메시지를 충돌시키는 어른들의 얼굴은 몸으로 체현된 욕망이 진실임을 주장한다. 거짓과 진실이 동시적인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는 배우들의 육체야말로 캐슬을 지탱해가는 허구적인 진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견고한 성은 두 번의 죽음에 의해서 균열을 일으킨다. 스카이캐슬에서 가장 성공한 엄마 명주 자살은 자식의 진학과 부모의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주민들의 삶을 뒤흔든다. 혜나의 죽음 역시 제일 높은 정점이 가장 위험한 장소임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활용하여 생존해왔던 “겁이 없는” 아이 혜나는 스카이캐슬로의 진입을 꿈꿨다. 혜나는 준상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자 입주과외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서진, 예서와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았다. 캐슬의 비밀을 알게 된 혜나가 캐슬의 가장 높은 테라스에서 추락사하는 장면은 겁 없이 꼭대기로 진입하려 했던 자격 없는 자의 절망에 가깝다.
그렇게 보자면 두 번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는 입시코디네이터 김주영은 캐슬 주민들의 진실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존재일 뿐이다. 김주영이 살인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것은 이런 현실이 승자 없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실이었다. 죽음을 목도하고도 기꺼이 그 위험을 감수하려 했던 한서진의 욕망은 이 허구 없이 현실이 존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내는데 성공한다.
<SKY캐슬>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미처 말로 옮기지 못했던 충동과 욕망을 눈으로 확인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자명한 선택의 순간, 좋은 부모와 성공한 부모 사이에서 캐슬 주민들은 수없이 갈등한다. 이 내면적인 갈등은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언급하기 어려운 그 욕망이 현실을 지탱하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목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의 역할을 외치는 이수임이 불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녀에게 결여된 것은 솔직한 욕망이다. 작가가 애초에 설정한 의도와 달리 평면적인 이분법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그녀에게는 해석의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을 때 이들의 행동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게 된다. 이수임은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원리원칙을 끝없이 반복적으로 외치기만 하는 인물이다. 반면 한서진은 사적인 욕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이들의 욕망이 옳은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이 욕망에 설득당하는 스스로의 마음이다. 물론 이 욕망이 실체 없는 허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욕망은 꽤 효용성이 있고 실제로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수임과 서진의 충돌에서 수임이 옳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서진에게 공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SKY캐슬>이 만들어낸 이 드라마적인 허구는 현실과 만났을 때 비로소 진실이 되는 것이다.
허기, 역사를 지탱하는 신(臣)
<킹덤>은 넷플릭스가 한국 공략을 위해 선택한 드라마다. 김은희 작가와 김성훈 감독 이 시리즈에서 중요하게 내세운 것은 ‘허기’다. 전란 후 식량을 찾아다니던 백성들은 인육을 먹고 역병에 걸려 좀비가 되고 세자와 주변인물들이 이 상황에 휩쓸리는 것이 <킹덤>의 주요 내용이다. 이와 함께 중전을 위시한 조학주와 세자 이창, 여기에 거짓 임신으로 새로운 구도를 그려 넣는 중전까지 <킹덤>은 비현실적인 위기 속에서 생존과 권력에 대해 끊임없이 허기를 느끼는 사람들을 그려낸다.
이 모든 사건은 세자 이창이 경상도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그가 궁을 떠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왕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중전과 조학주의 방해로 왕의 생사확인이 어려워지자 세자는 왕을 치료했던 의원 이승희를 찾아 전모를 밝혀내고자 했다. 하지만 지율헌에 도착한 세자는 죽지 않는 백성들의 시체와 대면하게 된다. 앞선 이유보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다. 세자가 궁을 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역모를 꾸민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중전과 조학주의 힘이 강해지자 세자는 유생들을 동원하여 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낸다. 자신이 역모죄로 몰릴 위기에 처하자 스승 안현 대감에게 의탁하기 위해 지체 없이 경상도로 도피한 것이다. 왕위보전을 위해 유생들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세자는 위협 앞에 자신의 안위부터 챙길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때문에 세자 이창이 역병에 걸린 괴물들과 마주했을 때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은 모순처럼 보인다. 자신을 외면했던 아버지와 신하들의 배신감으로부터 회피하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세자는 백성과 군주의 관계를 정립해 나간다. 그렇게 보자면 세자는 백성을 위하는 선한 군주보다는 자신의 왕위 보전을 위해 타인을 소모하고 회피하는 비겁한 전략가에 가깝다. 권력에 대한 허기, 적통에 대한 집착은 조선을 유지해나가는 사대부들에게도 일괄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무기를 들지 않으려는 양반, 적자의 시체를 태우지 않으려는 부인, 경상도 전체를 폐쇄시킨 조학주에 이르기까지 역병에 대응하는 인물들은 왕국을 유지하는 것이 이 권력과 생존에 대한 허기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허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작가가 전하려는 강력한 메시지일 것이다.
이렇듯 <킹덤>의 조선은 선과 악으로 재단되는 투명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새롭다. 역병의 한 가운데에서 세자-조학주-중전-안현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들이 생존을 놓고 벌이는 왕좌의 게임은 권력과 공포 사이에 선 인간의 허기를 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김은희가 <킹덤>을 통해 그리는 역사는 ‘욕망의 박람회’에 가깝다. 거대한 악까지는 아닐지라도 텔레비전 바깥의 풍경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냉철한 해부학적 시선이야말로 김은희가 내놓은 드라마의 해답이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넘나드는 김은희의 실험이 의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텔레비전드라마에서 솔직한 욕망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하다. 윤리라는 빛을 향해 일률적으로 전진하던 텔레비전드라마 속 인물들이 이 욕망을 발견했을 때 시청자들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실제로 이 욕망이 현실의 생존게임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SKY캐슬>이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 김주영의 검거와 함께 캐슬 주민이 회심을 거듭하는 마지막회는 드라마적인 기회에서는 철저하게 성공적이다. 하지만 욕망을 끊임없이 긍정하며 자신과 가족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던 인물들이 쉽사리 마음을 돌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유현미 작가가 실천했던 것은 김주영이 주장했듯 절정의 순간에 회복할 수 없는 배신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이 실패하려는 용기야말로 드라마를 보는 모두의 욕망을 철저하게 실패로 만드는 메타적인 메시지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실패의 고통 속에서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린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찾아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킹덤>은 시즌2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 많은 여지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안심한 순간 의녀 서비의 마지막 대사는 아직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 대사를 통해 좀비와 함께 다가올 킹덤의 실험에 시청자를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게임적이다. 넷플릭스가 기획하고 김은희가 써내려간 이 욕망의 게임은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지상파만의 문제가 아니라도 텔레비전으로부터 일탈한 드라마는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이동하면서 점점 더 새로운 미디어를 찾아가고 있다. 드라마는 이제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작가주의, 시청률지상주의로 대표되는 제작방식은 물론 광고와 모자이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고 있는 드라마가 전부 허구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이 자족적이고 아름다운 허구의 세계를 택하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은 텔레비전 밖으로 계속해서 감염되고 있다.
텔레비전이 그리던 이분법적인 편리한 세계는 더 이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