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시트콤 <논스톱>과 청춘 다큐 <다시, 스물>
캠퍼스, 밀레니엄의 공간
낭만이 전부인 시간이 있었다. 스무살, 누구나 지나왔던 청춘의 시간 말이다. 2018년 9월 MBC에서 방송된 청춘 다큐멘터리 <다시 스물>은 이제는 빛이 바랜 옛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지나가버린 청춘을 텔레비전으로 소환했다. 17년이 지나 다시 만난 <뉴 논스톱>의 연기자들은 어른이 된 모습으로 과거를 함께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아마도 희미해진 청춘에 대한 기록을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에게 흥분을 전달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논스톱> 시리즈는 한국 시트콤의 역사에서 시즌제를 거듭하면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시리즈다. 외환위기 이후 대학생들의 시선으로 세계를 낙관적으로 그려냈다. 1995년 <LA 아리랑>을 시작으로 시트콤이라는 형식은 한국 방송계에서 주류 장르로 자리 잡았다. 미국에서 <Friends>(1994~2005)가 청춘 시트콤의 시대를 열자 이를 이어받은 <남자 셋 여자 셋>(1996~1999)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06년 <레인보우 로망스>에 이르기까지 시트콤은 청춘을 주된 소재로 삼았고 이들을 통해 과장되어있지만 즐거웠던 청춘의 기억을 만들어나갔다. 외환위기를 갓 지나온 청춘들이 조심스럽게 밟아가야만 했던 현실을 시트콤이라는 다소 희화화된 형태의 드라마가 재연해냈던 것이다. 저예산의 조악한 제작환경에도 불구하고 청춘 시트콤은 현실 세계를 과장되고 희화화된 캐릭터를 통해 돌파하려 했다. 신인배우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한편 비현실적인 설정과 에피소드가 난립하는 비현실적인 캠퍼스는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취업난에 고의적으로 졸업과 결혼을 유예하려는 동엽을 바라보던 <남자 셋 여자 셋>의 측은한 시선이 <논스톱> 시리즈로 이어지는 현상은 분명 90년대와 달리 청춘을 바라보던 새로운 시선이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현실과 드라마의 낙차에서 오는 해리를 균형있게 재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희화화된 ‘웃음’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학생들의 현실에서 공존하는 희망과 절망은 시트콤의 가벼움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충격이기 때문이다.
<논스톱>의 출연진이 다시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기사가 가능했던 것은 어두웠던 청춘의 한 가운데에서 느꼈던 동질감에 대한 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90년대의 기억을 사랑이란 주제로 소환해낸 것과도 비슷한 현상이다. 90년대의 소품을 통해 기억을 재구성했다면 다큐멘터리 <다시 스물>은 실제 배우들을 소환하는 것으로 현재에 응답했다. 90년대를 지나 희망과 절망이 점철된 밀레니엄의 청춘을 지금 여기로 소환한 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청춘의 낭만을 기억하고 있는 3040 세대의 기억은 <다시 스물>을 통해 충분히 환기될 수 있었다. 내가 지나왔던 캠퍼스, 내가 기억하는 연애가 즐거움이라는 감정으로 기억을 소환시키는 것은 지나온 과거 속의 나를 찾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겪었던 청춘에 대한 기억이 <논스톱>의 캠퍼스로 돌아가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현재의 텔레비전이 보내는 헌사에 가깝다.
슬픔의 증언으로서의 청춘
청춘이 희망의 증거이던 시절이 있었다. 전례 없는 청년실업과 세계화의 그림자 속에서도 캠퍼스에 머문 청춘은 늘 유쾌했다. 현실의 충격에서 한걸음 벗어나 과장된 슬랩스틱과 말장난을 오가며 청춘은 늘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다. 청춘 시트콤의 청년들은 늘 사회에 대해 밝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부족하지만 건강함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연기자들이 <논스톱> 시리즈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강한 프로그램”으로 기억하는 것도 처춘 시트콤이 현실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청춘 다큐 <다시 스물>은 ‘슬픔의 기록’에 가깝다. 일정한 수입이 생겨 프로의식을 처음 느꼈다는 스타의 소박한 고백을 시작으로 웃음 이면의 그림자가 수면으로 올라온 것이다. 밝은 웃음 뒤에는 “시간단위로 잠을 자본적이 없는” 가수와 하차 압박에 시달려 동료들을 철저히 외면했던 배우, 어린 나이에 꿈을 이뤄 하루하루 공허한 내면으로 연기하던 배우에 이르기까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인내의 기억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15년이 지난 지금 알게 된 MC의 눈물에 이르러서는 마치 우리가 현실의 그림자를 청춘이라는 허상을 통해 철저하게 외면하려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쯤 되면 다큐멘터리 <다시 스물>이 전하고 싶었던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이 되어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청춘이 겪어왔던 시간들은 사실 고통과 인내를 침묵으로 대신하며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것으로 가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저 시트콤일 뿐이었던 <논스톱> 시리즈가 끝내 침묵했던 이야기들은 청춘의 낭만 뒤에 가려진 현실이었다. 피터팬이 될 수밖에 없었던 청춘들은 어른들의 질서 안에서 모두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했을 뿐이다. 수면부족으로 촬영 도중 배우가 졸도하던 장면이 찍힌 에피소드는 연예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되었음에도 별다른 후속조치 없이 지나갔다.
가상의 공간(캠퍼스)을 배경으로 매일 새로운 에피소드를 전개하던 시트콤은 2000년대를 끝으로 점차 사라져갔다. 줄곧 희망의 근거였던 청춘은 이 시기를 기해 텔레비전에서 사라져간다. 사회의 짐이 되어버린 청춘들은 자연스럽게 카메라 밖으로 멀어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동정과 연민이었다. 문제는 동정과 연민을 통해 사회가 청춘을 특정한 프레임 안으로 한정시켰다는 사실이다. 88만원, 가난, 아픔, 포기 등의 키워드가 청춘을 수식하는 언어로 빈번하게 소환되는 것은 세계가 청춘을 대하는 가장 진솔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들에게 있어서 청춘은 연민은 생기지만 결국 짐 덩어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청춘은 더 이상 낭만이 생존하는 공간이 아닌 세계의 끝으로 밀려난 외부의 공간일 뿐이다. K-drama의 전 세계적인 인기에도 청춘은 텔레비전에서 빠르지만 확실하게 잊혀져 갔다.
청춘 시트콤의 퇴장과 함께 현실의 민낯을 과장된 웃음으로 풍자하던 김병욱 사단의 <하이킥> 시리즈가 텔레비전드라마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이킥> 시리즈는 시트콤조차 더 이상 시대의 무게를 외면할 수 없다는 위험신호에 대한 징후와도 같았다. 시트콤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비극적인 결말을 그려내던 김병욱 사단이 호불호를 넘어 사회적인 이슈로 회자되는 것은 ‘겨우’ 시트콤이 한국사회의 그림자를 과장되지만 진솔하게 표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병욱이 그려냈듯 지금 여기의 청춘은 언제나 비겁함과 연민의 중간쯤에서 겨우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근거가 아닌 증상으로 변해버린 청춘은 결국 15년이 지나 세상과 다시 만났다. <논스톱> 시리즈가 보여주었던 청춘에 대한 해석과 한국사회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웃음으로 무마시켰던 고통의 기록은 지워지지 않은 채 다시 돌아왔다. 어른들이 청춘을 대하던 태도, 연민을 느끼지만 그 고통에는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양가적인 태도는 결국 진실을 침묵으로 대체하려는 암묵적인 강요에 가깝다. 이 고통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한국의 텔레비전드라마가 전진해왔는지 이제 되물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