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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Jan 20. 2018

인간의 조건

- 법과 로봇 사이의 드라마

 단언컨대 2017년은 법의 해였다. 대통령 탄핵과 함께 시작되었던 헌법에 대한 관심은 고스란히 텔레비전드라마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비밀의 숲>(tvN, 2017)을 시작으로 변호사와 검사, 판사가 드라마의 중심인물로 채택되며 법이 시청자들의 관심영역으로 대두된 것이다. 법에 대한 관심은 곧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사회적 문제들이 해결되어야한다는 시민의식의 진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법과 절차에 따른 제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일상 속에 잠재된 악이 개인의 불행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쳐져있는 모두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쩌면 2017년 초부터 혼란스러운 탄핵정국을 건너온 한국 시민사회의 자연스러운 의식적 흐름은 아닌지 짚어볼만한 경향이다. 


  이렇듯 법으로까지 영역을 넓히던 텔레비전 드라마가 한편으로 로봇과 인공지능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뜬금없는 전환이나 다름없다. 추리만큼이나 SF물에 이질적인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로봇이나 인공지능은 어린이물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을 뿐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새로운 과학과 기술에 대한 단순 호기심 너머에 있는, 말하자면 미국의 <스타워즈>나 일본의 <건담>과 같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SF물은 적어도 한국의 주류 대중문화에서는 요원한 것이었다. 더구나 시청자들의 일상과 가장 밀접하게 맞물려있는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과학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분명 법과 로봇은 이질적인 요소이지만 공통된 미디어를 통해 발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현재를 그려내는 새로운 기호체계이기도 하다. 이 이질적인 두 영역이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차례로 그려지는 현상은 명확한 변화이다. 다소 피상적인 현상 나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2018년이라는 새로운 한 해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작년 한 해를 정리하고 이제 곧 다가올 새로운 한 해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시작해본다. 



일상의 그늘


  추리의 전성기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한국 텔레비전드라마는 분명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범죄에 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호평을 받았던 <시그널>(tvN, 2016)의 인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추리의 보편화는 가속되었다. 케이블 채널인 OCN은 범죄드라마를 전문적으로 만들겠다는 표명 아래 <보이스>(2017), <터널>(2017) 등을 제작했고 이에 발맞추어 지상파 채널에서도 추리가 적극 활용되면서 예능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추리의 시대’가 열렸다. 

  이 드라마들은 대체로 경찰로 대변되는 공권력을 통해 추리와 탐문을 통한 검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존 추리소설 등에서 활용되던 ‘사건의 발생’에 따른 ‘탐정의 활약’과 ‘범죄자의 단죄’가 계열화되어 에피소드의 주요 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때 드라마들은 주로 사건의 발생을 시작으로 경찰 혹은 검사 등의 공권력에 집중한다. 현대사의 질곡을 건너면서 공권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신을 내보이던 정서와는 분명 상반되는 흐름이다. 단순히 드라마 속 주요 인물들의 사회적 지위로만 기능하던 ‘법’은 일상에 드리워진 불안이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상의 범주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불안의 그늘은 법이라는 제도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한다. 살인 및 성범죄 등의 강력범죄는 일상의 도처에 널려있고 단지 수사와 체포 후에도 해결되지 않는 남겨진 잔여들을 상기시킨다. 결국 법에 대한 열망은 이 잔여를 해소하겠다는 욕망에 가닿는다. <마녀의 법정>과 <이판사판>이 여성 법조인을 내세우며 여성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강력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단죄의 의지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 법을 수행하는 두 가지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가해자를 구별해내는 보편적인 사회 ‘도덕’과 개인의 질서를 가늠하는 ‘관계’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수상한 파트너>(KBS, 2017)와 <당신이 잠든 사이에>(SBS, 2017)는 검사실을 배경에 두고 강력범죄의 발생과 이의 해결을 다루고 있지만 이들은 각각 가족과 연인, 친구관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 두 드라마는 강력범죄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법의 제도 아래 해결하고 있지만 사실 이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도덕과 관계다. 법이 가지는 논리와 이성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에 대한 동정과 가해자에 대한 증오다. 궁극적으로 이를 해결하는 것은 역시 친밀감에 기댄 사적관계이다. 


  결과적으로 법정 드라마의 형식을 갖추고 이에 걸맞는 인물들을 최전선에 배치하고 있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은 가장 일상적인 도덕과 관계에 기대고 있다. 곧 일상 속에 내재된 악의 해결은 여전히 법이라는 근대적 제도의 이성과 합리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불안의 감정을 추동하고 해결하는 것은 사적 관계다. 따라서 기이해보일 정도로 공과 사의 경계가 불분명함에도 무리 없이 수용되는 것은 곧 한국 사회 내에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2017년 이후 방송된 ‘법정 드라마’들은 법이라는 제도에 기대어 일상을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국에서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기 위한 ‘조건’에 더 가깝다.



로봇일상의 필요조건


  인공지능과 로봇산업이 큰 위치를 점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지난 정권부터 꾸준하게 제기되던 정책이었다. 알파고의 탄생을 지나 과학기술의 융성이라는 장기적인 국가 비전이 제시되면서 이에 발맞추어 대중문화 콘텐츠 역시 로봇과 인공지능이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고 쇼크를 통해 인공지능의 가시적인 성과를 목도한 대중에게 이러한 선택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보그맘>(MBC, 2017)이라는 독특한 소재의 드라마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사회적 변화에 발맞춘 방송사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해 만들어진 로봇이 등장한다. 아내와 같은 외모를 지닌 로봇은 아내의 역할은 물론 엄마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하며 헬리콥터맘들 사이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 방송된 <로봇이 아니야>(MBC, 2017)에서는 인간 알러지 때문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재벌을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 나온다. 로봇을 만든 박사의 전여친을 모델로 만들어진 로봇이 오작동을 일으키며 실제 모델이 로봇을 대신해 연기한다는 내용을 보여준다. 

  

  두 편의 드라마는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과 비슷한 행동, 생각, 말을 할 수 있는 로봇이 실제로 만들어진다는 가

정 아래 일어나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물론 두 편의 드라마에서 로봇을 만든 이유와 활용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흥미로운 점은 로봇을 다루는 시선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엄마’ 혹은 ‘반려자’로 구현된 로봇은 실제 가족 내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역할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다. 로봇이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SF물과 달리 인간을 대신하는 ‘역할’에 더욱 집중한다. 때문에 로봇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가도 무리 없는 설정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로봇을 다룬 두 편의 드라마는 실제 배우가 로봇을 연기하든, 혹은 로봇을 가장한 인간을 연기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관계의 고리다. 부재하는 연결점을 찾아 인간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 현재의 상황에서 로봇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을 대체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들이 기대하는 것은 대체 도구로서의 로봇이다.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부재하는 엄마, 혹은 반려자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법과 로봇이라는 생소한 장르적 특성을 적극 활용함에도 드라마는 무의식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을 반영한다. 법과 과학이 그려내는 세계란 오히려 인정과 당위에 따르고 있다는 징후적 흔적에 가깝다. 결국 일상 속에 잠재된 악에도, 과학이 열어버린 새로운 일상 안에도 지금 여기에서 ‘일반’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새로운 장르의 발견과 그 진보 사이에서 너무나도 뚜렷한 선악 구도와 희미한 공사의 경계가 끊임없이 회귀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곁을 헤매는 ‘잔여’들은 무의식적으로 회귀하고 있을 뿐이다. 보여지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확인되는 그 자리가 어쩌면 드라마가 위치하는 곳이기 때문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웹진 <문화다> 2018년 1월 19일




  일정한 장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장르의 공식과 문법이 수용되는 방식에 어색함이 없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서 법과 과학, 즉 근대성을 전제로 하는 분과학문의 대중적 수용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위치에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가장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어야하는 법조인과 과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적인 것으로서의 '관계'라는 점은 한국 사회의 징후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치명적인 결점이기도 하다. 한국 드라마에서 가장 확고하고 정확한 기준으로 자리잡는 도덕심은 이성/합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때문에 일상에 잠재된 불안은 오로지 개인적이고 폐쇄된 사적 관계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해야할 검사와 판사가 피해자의 증거를 대신 찾아주고, 상대 변호사와의 사사로운 관계에 얽메여 도덕적 판단에 따라 신념을 거는 것은 실상 재앙에 가깝다.


  때문에 근 몇년간 한국 드라마의 형식을 바꿔놓은 법과 과학은 실상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하는 틀로서 기능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한국 드라마가 내세우고 있는 감정적 당위, 즉 사적인 관계를 가로지르는 것으로서 법과 로봇이 도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대중의 동의라는 근거만으로 구축된 사회의 외부는 현재의 한국 드라마가 상상하기에는 머나먼 이상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미드 <Good fight>에서 출세의 한 가운데에서 밀려난 세 명의 여성 법조인이 감내하는 냉혹한 사회는 근대적 이성에 의해 축조되어 빈틈없는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신뢰하는 법은 실패자이자 은퇴자이며 소수자인 이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로봇이란 소재 역시 화려한 과학기술의 디스플레이에서 벗어나 인간과 그 외부를 상상하는 방법으로 진보하고 있다. 게임 <Detroit become human>(퀀틱드림, 2018 발매 예정)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안드로이드를 조종하게 하여 특정한 상황 속으로 몰아넣는다. 예컨대 학대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보여주며 이를 위해 무슨 선택을 해야할지를 강요하며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해놓는 식이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구동해야할 로봇에게 윤리적 선택의 상황을 강요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이 과연 일반적인 도덕관념과 일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이 게임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장르의 도입, 혹은 진일보는 외형적 틀을 빌려온다고해서 확립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옳다고 생각되어 일반 사람들의 마음 속에 견고하게 구축된 세계의 뒤편을 상상할 수 있는지, 혹은 그 그림자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응시할 수 있는 장(stage)을 마련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적어도 현실이 아닌 '드라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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