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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Sep 16. 2016

Wife, Mother and I <굿 와이프>

tvN 드라마 <굿 와이프>(이정효 연출, 한상운 작, 2016)

The Good ‘Wife’


  7년이었다. Mrs.Florrick(줄리아나 마굴리스)이 Alicia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 말이다. 추락한 검사장의 부인에서 성공한 로펌의 대표가 되기까지 알리샤가 성공적인 여성으로 자신의 위치를 옮기는 데에는 부단한 노력과 적응이 필요했다. 그녀가 마지막 선택을 하기까지 걸린 7년이란 시간은 실제 방영시기뿐만 아니라 알리샤와 윌(조시 찰스), 피터(크리스 노스) 등이 감내해야했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The Good Wife>(CBS, 2009~2016)는 정치와 법으로 이루어진 공적인 장이 개인과 개인의 ‘삶’이 뒤엉킨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대한 예리한 시선을 담아냈다. 알리샤가 겪어야했던 비정한 법의 세계는 개인의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백그라운드가 아니다. 무엇이라도 동원해서 살아남아야하는 현실일 따름이다. 어쩌면 알리샤가 7년의 시간동안 깨달은 것은 이 사실이 전부인지도 모른다. 


  다양한 사회적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 미국에서 알리샤가 겪어야했던 어려움이 이럴진대 한국에서 혜경(전도연)이 감당해야했던 고통 역시 작을 수 없다. 15년의 공백을 뒤로 하고 복귀한 법정은 결코 녹록치 않은 공간이었으며 남편의 실패는 곧 아내의 실패로 되돌아와 끈질기게 혜경의 삶을 붙잡았다. 그렇기에 사건 이후 혜경의 삶은 중원(윤계상)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중원의 배려로 로펌에 취직하며 갖는 혜경의 안도감은 상징적이다. 이전에는 태준(유지태)이 혜경이 가진 세계의 전부였다면, 이후에는 중원이 혜경의 생존을 결정지을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앞둔 남편의 정치적 고난보다도 아내의 눈에 들어온 것이 겨우 풀어진 실밥이었듯이 혜경(과 알리샤)에게 허락된 세계란 성공한 남성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아내의 법여자의 윤리


  “우리 다시 예전으로 못돌아가.” 한순간에 자신이 쌓아왔던 삶을 부정당했던 혜경은 수의를 입은 태준에게 과거와 현재의 괴리를 말했다. 다른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가장인 태준을 바라보는 혜경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가감 없이 스며든 반응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좋은 아내의 역할을 수행했던 혜경이 내면의 변화를 겪었던 것은 자신이 디디고 서있는 현실이 거짓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안이 극에 달하는 지점은 중원과의 키스 후 태준에게 달려가 사랑을 나누는 시퀀스였다. 두 남자 사이의 혜경은 법의 세계처럼 명징하고 투명한 합리성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은 삶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솔직한 욕망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행동을 취했을 뿐이다. 이 장면은 좋은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가기 위해 억압했던 욕망을 깨달은 장면이기도 하다. 아내 혹은 엄마가 아닌 자신만을 위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은밀한 사실을 깨달은 혜경의 모습은 추상적인 불륜이나 막장 너머 한 여성이 감당해야할 현실의 무게가 담겨있다.



  수사관 김단(나나)이 태준과 은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실이 폭로되면서 혜경의 불안은 극적인 지점에 도달한다. 아이들의 아빠였던 태준과 가장 의지하던 친구였던 김단의 부적절한 관계는 혜경을 지탱하던 과거의 행복이 거짓에 기반 하여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환기시킨다. 혜경이 느꼈던 혼란은 변호사들과의 싸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여정과도 맞닿아있다. 진실의 추구를 변호의 1순위로 세웠던 혜경이 동욱(유재명), 수현(오연아)과 싸워가면서 승리의 방법을 깨닫는 것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여성 성장 서사나 불륜 극복담으로 분류될 수 없는 현실의 원리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법에서 물러나 전업주부의 길을 택한 혜경의 삶은 오히려 공고하게 이루어진 법과 정치에 기대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무엇보다 선명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불투명해졌을 때 혜경이 선택한 길이 법이었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머물러왔던 현실로의 귀환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물론 혜경이 꿈꾸던 현실은 선과 악, 혹은 아군과 적군으로 쉽게 양단되는 것이었지만 실제 법 앞에서 마주해야했던 현실은 이익과 이익이 맞부딪치는 역설의 장이었다. 



법의 역설 앞에서


  “역시 양심보단 실력이죠?” 태준이 가족과 정의를 외치며 나락으로 떨어질 때 혜경이 그리워했던 것은 어쩌면 사실과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되어야하는 법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 포기했던 법이 혜경을 구원할 때는 혜경이 진실과 마주하는 방법을 달리할 때였다. 혜경이 제약회사를 상대로 엘바틸의 부작용을 밝혀내던 소송이 끝나자 명예퇴직을 종용받던 노동자의 자살이 엘바틸의 부작용 때문이라는 상대 변론과 마주하는 장면은 법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이 실상 모순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무엇이 진실인가보다도 어떻게 진실이 될 수 있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야말로 합리적인 법의 독해 방식이다. 사건의 진실에 집착하던 혜경이 점차 변론의 타당성에 집중할 때 변호사로서의 커리어가 완성되어간다는 사실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던져준다. 


  

  자신의 장애조차 변론의 무기로 사용하던 동욱이 혜경에게 건넨 쪽지에 쓰여진 말은 혜경을 혼란시키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지만 변호사 김혜경이 완성되는 데 필요한 것이 이미 혜경의 안에 억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동욱의 통찰이 담긴 것이기도 하다. 또한 혜경이 아내이자 엄마의 자리에서 끝내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과의 대면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혜경은 MJ 로펌 소속 정식 변호사가 되었고 태준과의 관계 역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태준-혜경-중원이 맺은 삼각관계는 감정과 신뢰를 토대로 만들어진 부부관계야말로 법으로 맺어진 공적 관계임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중원과는 회사 동료로, 태준과는 쇼윈도 부부로 남게 된 혜경의 선택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영역들이 실은 역설에 기반 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굿 와이프>만의 대답이었다.  



  <굿 와이프>가 여성의 연대와 해방, 혹은 욕망의 좌절을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독립된 개인이 맞이하고 받아들여야하는 사회적 현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폭넓은 시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 <The Good Wife>가 선택한 논란의 결말 역시 혜경의 취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터를 사랑하지 않지만 개표 조작으로 기소된 남편을 위해 동료를 고통 속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은 시리즈 내내 이어진 알리샤의 모습과는 분명 대비되는 것이다. 마치 정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피터가 빙의된 것처럼 알리샤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다. 하지만 알리샤의 선택이 자신의 커리어와 욕망을 지키기 위한 솔직한 선택이었음을 기억하자. 시리즈 피날레에서 알리샤가 피터의 기자회견장에 들어가지 않고 사랑하는 제이슨(제프리 딘 모건)의 그림자를 쫓아간 것은 이 모든 선택이 자신의 솔직한 욕망에 기인한 것임을 환기시킨다. 언제나 변호사로써의 경력과 양심을 계산하며 자신을 지켜오던 알리샤가 일말의 고민 없이 피터를 구해내는 마지막 엔딩은 억압과 탈주의 선택 만으로 서사를 완성시킬 수 없는, 그리하여 합리적인 토대 위에 세워진 부조리한 현실을 그리는 <The Good Wife> 만의 드라마적인 대답이기도 하다. 


  혜경이 성공한 변호사이자 남편의 고난을 묵묵히 지지해준 아내가 되기까지 드라마 안에서 소거된 수많은 이야기들을 16화안에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7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원작과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법과 진실, 현실과 이상의 복잡다단한 맥락을 혜경은 끝까지 버텨냈고 자신만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다. 이런 혜경의 선택에 도덕과 법률에 기반한 평가를 들이미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드라마 내내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들이미는 혜경의 모습은 자기분열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굿 와이프>는 ‘겨우’ 드라마일 뿐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진실의 언저리에 놓여있다. 그러니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실험은 이제 겨우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을 내딛었을 뿐이다. 


웹진 <문화다> 2016년 9월 12일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쓰고 있습니다.

웹진 <문화다>에서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2015)와 <야누스의 여신 이은주>(문화다북스, 2016), <흙흙청춘>(세창출판, 2016)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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