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iHyuk Apr 05. 2016

고통의 시간, 상처의 기록

tvN 드라마 <시그널>(김원석 연출, 김은희 작, 2016)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과거의 사람이 물었다. 같은 공간을 살아갔지만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것은 어쩌면 달라지지 않을 현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그널>(tvN, 2016)이 장르물이라는 생소한 외피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가 현실에 대해 던질 수 있는, 혹은 던져야만 하는 무게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싸인>(SBS, 2011)에서부터 체감되는 이 무게는 정의가 한국 사회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재연해내는 김은희 작가만의 고유한 형식처럼 보여 진다.


   때문에 김은희의 드라마가 미드(미국드라마)를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재연했는지, 혹은 추리의 과정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려냈는지를 비교하는 글들은 따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혹은 김은희가 그려내는 범죄들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맥락에서 벌어진 장기미제로 남겨진 사건들이다.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의 한 복판에서 여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일 리가 없다. 김은희가 <시그널>을 통해 체감시킨 현실의 무게는 장기미제사건이 수수께끼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사건’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기에 자신의 신념조차 지킬 수 없는 세상에서 미약하게나마 진실을 찾으려했던 과거의 형사에게 20년 후의 무전이 연결된 것을 우연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언제나 그랬다. 죽은 자들의 메시지를 해독하거나(<싸인>), 사이버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텍스트들을 귀환시켰던(<유령>) 김은희 작가는 단순히 사건의 재연과 해결을 통한 카타르시스에 몰두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의 관심은 ‘인간’에 있었고, 정의나 진실 같은 거대한 이야기들은 나약한 인간을 통해 드러났다. 때문에 김은희 드라마 속의 수많은 인간들은 쉽게 현실과 타협했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가 그려낸 인물들은 현실의 불의에 쉽게 무릎 꿇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들이었다. 여기에 한국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맥락은 쉽게 용해되지 않고 수면 위를 겉돌며 끊임없이 현실의 중압감을 환기시킨다.

   이렇듯 <시그널>이 비현실적인 설정을 고수했던 것은, 판타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현실의 간극을 필연적으로 확인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들을 수 없었던 침묵의 증언을 듣기 위해 죽은 자들의 싸인(Sign)에 집중했던 과거의 작품들과 달리 살아남은 자들의 신호(Signal)를 확인하는 지난한 작업이 <시그널>에는 존재한다. 죽은 자들과 달리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는 2016년의 한국을 이해하는 가장 절실한 신호처럼 보인다. <시그널>이 두르고 있는 장르물의 외피는 이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재의 한국을 설명하는 가장 적실한 형식은 추리와 판타지일 수 있다. 행복의 환영조차 불가능해진 시대에 상식과 정의에 대한 응답이 일상 속의 사랑과 가족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범죄자의 얼굴을 한 이웃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상상(혹은 진실)은 서스펜스와 스릴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적인 설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메타포다.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불안을 환상과 추리라는 상이한 두 형식의 충돌을 통해 그려내는 것은 적절한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은희가 그려낸 풍경들은 우리의 ‘오늘’에 대한 드라마적 진실이다. 현실의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공허한 환상과 논리적인 설명으로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낙차를 확인하기 위해 <시그널>을, 김은희의 드라마를 들여다보는 것은 드라마가 발성하는 간절한 울림을 듣는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범죄의 계보, 우리의 역사



  ‘무전기를 통한 과거와 현재의 교신’은 이미 여러 번 반복되었다. 굳이 영화 <프리퀀시>나 <동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드라마와 게임, 웹툰 등을 통해 수없이 반복된 현재와 과거의 연결은 새로운 소재라고 보기 어렵다. 사람들은 과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과거를 바꿀 가능성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시그널>은 사건의 해결이나 범죄자의 처벌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전이 계속될수록 드러나는 거대한 ‘사회’의 존재가 그 바닥에 깔려있다.

<시그널> 4화 중에서

   20여 년의 시간을 넘어 낡은 무전기를 통해 연결된 재한(조진웅)과 해영(이제훈)은 한국을 뒤흔들었던 장기 미제 사건의 해결을 위해 서로가 서로의 단서를 모으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사건의 본질이다. ‘경기 남부 살인사건’의 8차 희생자를 구해냈음에도 다음 피해자는 여전히 발생하고, 홍원동에서 이루어진 수현(김혜수)의 납치 역시 막아내지 못한다. 해결의 카타르시스를 포기하면서까지 <시그널>이 집중했던 것은 환상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을 역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도 사건 자체를 막아낼 수 없는 사건의 불가역성은 변할 수 없는 역사의 실체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사건의 불가역성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꿔야한다는 강박적인 질문을 뒤집는 효과를 가져 온다. 현재가 바뀌면 과거도 바뀐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 텍스트가 설정해놓은 규칙들에 얽매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설정은 <시그널>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 엄연히 우리 눈 앞에 존재하는 ‘현재’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시그널>은 이것이 기억에 관한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의 이면에 잠들어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들, 이를 듣는 것이야말로 과거가 보내온 신호에 대해 응답하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때문에 사건을 덮기 위한 기자회견이 해영이나 재한의 목소리에 의해 번번히 중단되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기록된 역사 이면의 쓰여 지지 않은 목소리들을 발굴하는 ‘기억의 고고학’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파헤쳐진 기억 이면에는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평범한 현실이은 사실 지워질 수 없는 범죄의 연쇄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나쳐온 역사는 ‘범죄의 계보학’에 가깝다.

<True Detective> opening


   그렇게 보자면 <시그널>의 정서는 90년대 당시 번영의 절정으로 달려가던 미국의 어두운 이면을 환기시켰던 HBO의 드라마 <True Detective>(HBO, 2014)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라 모두가 믿었던 그 시절을 기억할때 느껴지는 낯선 감정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러스트(매튜 맥커너히)와 마티(우디 해럴슨)가 과거의 사건과 함께 불쾌한 개인적인 감정까지 함께 마주하는 장면은 우리가 의식 밖으로 밀어냈던 것들이 사실은 가면을 쓴 채로 함께 살아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때문에 어두운 도로와 황폐한 풍경을 교차적으로 흐릿하게 처리하며 시작하는 오프닝은 두 드라마가 비슷한 질감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다.

   <시그널>의 모티프가 되었던 실제 사건들(화성연쇄살인사건,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사건, 신정동 연쇄살인사건,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우리가 애써 구석으로 밀어냈던 은폐된 기억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그들이 숨 쉬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단서를 찾으면 찾을수록, 사건 해결을 위한 간절함이 증폭되면 증폭될수록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의도적으로 망각되었던 기억들은 더욱 강력하게 돌아온다. 결코 없어지지 않을 상처와 함께.



‘상처의 기록’으로서의 드라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알려진 트라우마는 상처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흔적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망각되는 것과 달리 충격적인 사건들은 무의식에 큰 상처를 남긴다. 트라우마는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경험들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을 처리하지 못한 채 고통에 빠져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시그널>이 장기‘미제’사건에 집중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잊혀 지지 않는 사건들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김윤정양 유괴사건에서 증언을 하지 못한 해영이나 경기남부연쇄살인사건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지 못한 재한, 홍원동 연쇄살인사건에서 납치당했던 수현의 기억은 개인이 져야 할 짐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이 사건을 목도했던 우리 모두가 져야 할 짐이기도 하다.

김윤아 <길>

   트라우마가, 망각할 수 없는 사건들을 통해 나 자신을 지워내는 상태라면 미제로 남겨진 사건들은 이를 목격했던 모두는 남겨진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자신을 지워낸 셈이 된다.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을 잊기 위해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를 현실에서 도려내는 것으로 그 많은 사건들을 밀어냈는지도 모른다. 결국 <시그널>을 통해 현재로 회귀하는 사건들은 우리가 망각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상처를 더듬어내고야 만다. 미제사건의 귀환에 어떤 공포를 느꼈다면 그것은 여전히 그 상처의 흔적이 무의식 속에 남아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았던, 혹은 인정할 수 없었던 실재가 현실을 찢고 나타날 때 회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또 다시 기억해내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선명하게 새겨진 기억들을 밀어냈다는 것은 적절한 애도의 과정이 생략된 채 불안정한 상태를 일상이라는 환상으로 덮어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잊으라’ 라는 말은 지울 수 없는 폭력이 된다. 적절한 애도의 과정, 즉 다시 기억해내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정상적인 망각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강요에 의한 망각은 결국 나 자신의 연속성을 단절시켜 절단해내라는 자살과도 같은 명령이 된다.


   해영과 수현이 미제 사건의 해결을 위해 기억하려 해도 기억할 수 없었던 과거를 꺼내야만 했던 것은 고통스럽지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필수적인 절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면했던 고통의 비명을 듣는 것은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거세시킨 채로 살아갈 수 없음을 공유하는 행위다. 때문에 이들의 기록을 읽고, 기억을 듣는 것은 트라우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자들의 억압된 목소리는 트라우마의 공간을 배회하는 시대의 증상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왜 미제사건‘들’인가"라는 질문은 반대로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다. 사건과 사건의 관계를 통해 현재와 과거의 교호적 관계를 더듬는 것은 ‘상처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더듬는 것이 된다. 쓰여진 것과 말해진 것 사이의 낙차는 역사를 새롭게 기록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에.


<시그널> 15화 중에서

  매순간 과거의 흔적들이 새롭게 바뀌어도 그 발생마저 막을 수 없었다. 이 지독한 사실을 끝까지 환기시키는 <시그널>의 정서는 무력감이나 신파감의 증폭이 아닌 트라우마의 기억에 대해 적절한 애도의 절차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미래와의 교신을 통해 재한은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여운은 가시지 않는다. 해영과 수현이 마주친 새로운 현재는 여전히 거대한 사회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재한이 피해자들을 살려낸 덕분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고 여전히 수많은 사건들은 미제로 남겨져 우리의 주위를 떠돌아다닐 것이다. 열린 결말은 그 자체로 비극적인 현실이 그저 지연되고 있을 뿐이라는 확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시그널>이 그려냈던 현실이란 환상으로도 매끈하게 뒤덮이지 않는 거친 절단면과도 같은 것이다. 현실의 이면을 확인하는 김은희식의 방법이 유효한 것도 여전히 멈추지 않을 거대한 사회 앞의 ‘인간’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때문이다. 이 연약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나와 너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만큼 지난한 과정을 눈  앞에 두고 있다. 하물며 의식 밖으로 애써 밀어냈던 기억을 현재의 공간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고통의 재연이기도 했다. 해영과 수현이 과거의 재한을 통해 트라우마의 기억과 대면했듯이 현실에 중층적으로 겹쳐져있는 상처와의 대면 역시 드라마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가능한 부분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이 드라마만이 할 수 있는 애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기에.


웹진 <문화다> 2016년 4월 5일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쓰고 있습니다.

웹진 <문화다>에서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2015)와 <야누스의 여신 이은주>(문화다북스, 2016) 등이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기, 사람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