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면 플레이어들은 달린다. 승자는 살아남고 패자는 죽는다. 기훈(이정재)이 삶의 바닥에서 마주친 게임의 세계는 단순했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시위 현장에서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기훈에게 어쩌면 오징어 게임만큼 공정한 세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기훈과 함께 게임에 초대된 상우(박해수) 역시 마찬가지다. 선물옵션을 기웃거리다 나락으로 떨어진 엘리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상우에게 게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시 위로 올라갈 수있는 기회의 세계였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데스게임은 승리만 한다면 다시 한번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기훈과 상우뿐만 아니라 탈북자, 조폭, 외국인노동자 등 삶의 끝자락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오징어 게임의 유혹은 달콤했다. 10만원에 뺨을 맞아가며 게임 속으로 굴러 들어온 456명의 사람들에게 오징어 게임은 삶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출구인 셈이다.
<오징어게임>의 매력은 단순한 게임의 룰에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딱지치기,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오징어 게임 등 어린 시절에 해왔던 ‘놀이’는 단순하지만 무엇보다 진실된 세계를 압축해낸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들이 유희를 통해 삶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확인해왔듯이 참가자들은 유일하게 게임의 세계에서만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일남(오영수)이 늙고 지친 몸을 이끌고 희열에 가득찬 표정으로 시신들 사이로 달려갔듯이 참가자들이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징어 게임이었다. 때문에 기훈과 상우는 삶의 감각을 찾기 위해 위험한 게임의 세계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기훈과 상우가 추구하던 세계가 균열을 일으킨 것은 해가 지는 골목길에서 구슬치기를 하면서였다. 살아야만 한다는 이유로 알리(아누팜 트리파티)와 일남을 죽음으로 내몬 상우와 기훈의 선택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사람답게 살았던 유년의 기억을 스스로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실보다 더 공정한 게임의 룰을 스스로 부숴버린 이후 게임은 급변하게 된다. 더 이상 유희가 지속될 수 없는 게임에 남은 것은 승패를 가르는 일뿐이다. 현실이 지옥이어서 게임 안으로 되돌아온 참가자들의 선택이 게임 속 세상 역시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역설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게임의 룰이 다른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때 <오징어 게임>은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정해진 결과를 향해서만 달려가게 된다.
이제 우리는 배신(<아리스 인 보더랜드>(Netflix, 2020)), 도박(<카케구루이>(mbs, 2017)), 살인(<단간론파>(mbs, 2013)) 등을 통해 삶과 죽음을 넘나들던 ‘배틀로얄’이 근본적으로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게임을 선택할 수 있을까. 마지막 게임에서 기훈의 중단선언은 게임이 추진해온 방향을 전복시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담담하게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상우의 선택이 더 윤리적이게 되는 게임의 역설에 도착하게 된다. 454명의 죽음을 밟고 올라온, 끝내 현실의 지옥을 게임 속에서 구현된 것은 승자의 자리에 선 참가자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넷플릭스가 기획한 K-콘텐츠 게임이 전 지구적인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는 기이한 현상은 현실과 게임의 관계를 통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임 속 세계를 그리워하며 돌아왔던 참가자들을 둘러싼 풍경이 현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등과 공정, 정의가 보장된다고 믿었던 게임의 뒤틀린 역설에 도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듯이 말이다.
* 이 글은 RollingStone Korea 홈페이지(2021.10)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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