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의 필모그래피는 마치 한국 대중예술의 기록과도 같다. 풋풋한 대학생 범수(<내일은 사랑>(KBS2, 1992))가 대한제국의 운명을 짊어진 유진초이(<미스터 선샤인>(tvN, 2018))가 되기까지 한국 드라마는 글로벌 콘텐츠의 한 축을 담당하는 K드라마가 되었다. 마치 그가 영화를 통해 충무로와 할리우드를 넘나들었던 것처럼 한국 드라마 역시 아시아를 넘어 세계라는 새로운 무대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병헌의 드라마 필모그래피를 다시 꺼내는 것은 K드라마의 지난 30여 년을 되짚어보는 것과 동의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90년대는 유독 많은 청춘스타들이 탄생했던 시대였다. 이병헌 역시 미숙하지만 똘끼넘치는 대학생으로 TV 연기를 시작했다. 90년대의 화려함 속에서 건실하게 미래를 설계하던 청춘들과 달리 이병헌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이었다. 그가 연기했던 자동차 디자이너(<아스팔트 사나이>(SBS, 1995)), 만년 2군 야구선수(<해피투게더>(SBS, 1999)), 복수에 눈 먼 안기부 요원(<백야 3.98>(SBS, 1998))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위태로운 파국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캐릭터들이다. 90년대라는 시대의 화려했던 기억, 그 뒤로 드리워진 그늘이 이병헌의 얼굴에는 늘 상존해 있었다.
이후 그가 연기한 연예기획자(<아름다운 날들>(SBS, 2001)), 겜블러(<올인>(SBS, 2003)), 비밀요원(<아이리스>(KBS2, 2013)) 등에서 보이는 입체적인 얼굴은 90년대부터 이병헌이 시청자들과 함께 쌓아온 시간의 무게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사랑이라는 불확실함에 몸을 내던지는 캐릭터들은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낭만’에 대한 드라마적 체현일 것이다. 유독 이병헌의 목소리와 눈빛이 수많은 패러디로 변주될 수 있었던 것도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낭만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병헌이 40대에 끝자락에서 마주친 유진초이와 프론트맨(<오징어게임>(Netflix, 2021))은 그가 새로운 문 앞에 도착해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와 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위태로운 선택을 결행하는 그의 연기는 이제 새로운 선택 앞에 도착해있음을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려했던 청춘의 기록을 지나 한국 드라마의 놓칠 수 없는 장면들을 연기하는 그를 여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K드라마의 새로운 페이지를 계속해서 읽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노희경과 함께 <우리들의 블루스>(tvN, 2022)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 이병헌은 지상파와 케이블, 종편과 넷플릭스로 이어지는 K드라마의 자화상을 다시 새롭게 그릴 준비를 하고 있다.
* 이 글은 Rolling Stone Korea 6호(2022.5)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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