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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Apr 21. 2023

트레드밀 사회에 던지는 질문

사회의 책임을 개인의 선택으로 전가하는 사회

왜 서울대 의과대학까지 나와서 미국에 갔어요?  


처음 만나는 한국 사람들로부터 생각보다 자주 받는 질문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세계 일류의 의학을 배우고 싶었어요’와 같은 멋진 대답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의 나는 한국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끝없이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가, 나에게는 너무 힘들고 버거웠으므로.     


나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인가 우리 사회가 최대 속도로 달리는 트레드 밀과 같은 사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잠깐이라도 멈칫하면, 트레드 밀에서 밀려나는 구조. 그리고 한번 밀려나면, 어지간한 노력이나 운이 없으면 트레드 밀에 다시 올라타기도 힘든 사회. 떨어지거나, 올라타다가 다치는 일도 다반사인 사회. 사실 의과대학 때 유급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트레드 밀에서 미끄러진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트레드밀의 초기 형태는 감옥에서 죄수들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도망쳐 나온 곳에 물론 낙원은 없었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의 연속이었다. 막상 미국에 와보니 한국이 그리운 순간들이 참 많았다. 이민자로서의 서러움, 문화, 언어적 장벽, 그리고 소수자로서 느끼는 일상의 차별. 특히 처음 5년간,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기간은 참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 기간의 힘듦은 힘든 수련 생활과 더불어 문화적, 언어적 장벽 또한 넘어야 했던 이민자라는 개인적 상황의 특수성 탓이 컸다. 5년이 지나 적응이 되어가자 새로운 사회에의 적응도 점차 이루어졌고, 차츰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니,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힘들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당연했던 것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잔인했는지, 얼마나 각박했는지 실감이 되었다. 그 당시의 나는 끊임없이 열심히 살면서도,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내 탓을 하곤 했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다.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2000년대 일본 프로야구 리그(NPB)에서 홈런왕을 차지할 정도로 맹활약하고 있던 이승엽 선수의 모자에 적혀 화제가 되었던 문구이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되게 해라’와 같은 말들이 마치 사회의 모토처럼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곳은 ‘나 자신’밖에 없었다. 내가 시험에 낙방한 이유는 내 노력이 부족한 탓이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은 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책으로 가득한 맘을 품은 채로 한국을 떠나야했다.  


외국에 나와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주로 친구나 동료로 만난 이들은 의학계, 혹은 대학에 몸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환자로 만난 사람들은 중고등학생, 대학생부터 이민자, 난민, 성노동자, 대기업의 임원,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삶을 알게 되며 느낀 게 하나 있다. 바로 한국기준에서, 한국 사람들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점. 아무리 힘든 여건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한국 사람들처럼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일하는 경우는 정말 손에 꼽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듦을 개인의 문제로 탓하는 현실이 아쉬웠다. 누가 봐도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인데,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는 경우가 많아 보여 마음이 아팠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미국 생활 중에 한국이 가장 그리울 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콜센터에 전화를 할 때'라고. 미국에서 콜센터 직원과 통화를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과제이다. 단지 상담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스피커폰으로 해놓고 기본 30분 기다리는 것은 예사고, 어떨 때는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릴 때도 있다. 그래놓고 막상 전화를 받으면 굉장히 불친절한 경우도 많고, 정작 도움이 되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콜센터에 전화를 하기 전에는 늘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가끔 한국을 방문할 때 콜 센터에 전화를 걸면 바로바로 목소리와 연결되고 문제가 착착 해결되는 것에 감탄하며, '아 역시 이래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다.


<다음 소희>라는 영화에서 우리는 소비자입장에서 만족스러운 콜센터의 어두운 이면을 보게 된다. <다음 소희>는 2017년, 대기업 통신회사의 콜센터로 실습을 나간 한 고등학생이 사망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로, 어떻게 한국에서는 전화를 걸면 바로 콜이 연결이 되는지, 또 왜 민원이 바로바로 해결될 수밖에 없는지를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받는 수화기 너머에는, 화장실 갈 시간도 확보하지 못한 채, 실적압박이라는 무거운 족쇄를 차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트레드밀에서 버티며 전화를 받는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비단 콜센터만의 문제일까? 나는 콜센터의 현실이 트레드밀과 같은 우리 사회의 단면일 뿐이라 생각한다.

<다음 소희>는 정말 콜센터만의 이야기일까?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는 단 한 해를 제외하고, OECD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였다. 작년 한 해 하루에 평균적으로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디 개인의 '선택'으로 이 비극들을 치부해 버리며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우리 사회에 묻고 싶다.

이 트레드밀은 언제까지 고장 나지 않고 최대 속력으로 달려갈 수 있는가? 언젠가는 천천히 달려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면, 그 시점은 언제인가? 그리고,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트레드밀에서 다치거나 떠난 사람들을 언제까지 우리 사회의 성공 신화의 어쩔 수 없는 희생양으로 합리화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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