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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Oct 15. 2023

내 속의 한국과 이별하는 일

영화 <Past Lives> 후기

누군가를 한국에서 꺼내올 순 있지만, 그 사람 안의 한국을  빼낼 순 없다(You can take someone out of Korea, but can’t take Korea out of them)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이상하리만큼 대학로가 그리워질 때가 많았다. ‘이상하리만큼’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에게 사실 대학로라는 공간에는 그리울만한 추억들도 물론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나의 힘들었던 기억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가끔 혼자 카페에 앉아 바라보던 대학로의 풍경이 찾아와 내 마음을 간지럽히곤 했다.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내가 내린 해석은, 내가 한국에 두고 온 내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민자의 시계는 이민온 시점에 멈춰있다는 말처럼, 대학로는 내가 한국에 두고 온 20대 후반의 청년을 상징하는 장소여서 그리웠다는 생각을 한다.

열두살의 나영과 혜성

영화 <Past lives>는 12세 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 간 나영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다. 실제로 어린 시절 이민 간 셀린송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 이야기지만, 본질은 한국계 이민자의 성장 과정을 담은 성장 드라마라 생각했다.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눈물 많던 한국 소녀는 자기가 울어도 한국과 달리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캐나다에서 노라라는 영어 이름으로 살며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간다. 그렇게 수년간 한국을 잊고 살다가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한 그녀는 비로소 한국에 ‘두고 온’ 첫사랑 혜성을 페이스북으로 찾고, 연결된다.


나도 그랬다.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는 한국 생각날 틈이 없이, 4년가량을 지냈던 것 같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의식적으로 내 안의 한국을 지워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간신히 좀 적응이 되었다 싶자 한국이 조금씩 그립기 시작했고, 한국으로 고개를 돌릴 여유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다시 블로그에 한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라와 혜성의 원격 로맨스는 오래가지 못한다. 페이스타임으로 서로 시차를 극복한 대화들을 수시간씩 나누지만, 노라는 혜성이 미국에 정착해야 하는 자신을 다시 한국으로 끌어당기는 존재라고 느끼기 시작하고,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한다. ’내가 뉴욕에서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데, 자꾸 한국행 비행기를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말과 함께.


첫 책을 낸 2022년 봄부터 지금까지 나는 마치 혜성과 처음 재회한 노라처럼 한국과 다시 연결된 느낌이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둘의 만남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삶이 병행되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노라가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민이라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국과 연결된 내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과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과 함께. 그 일부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일지라도.


한국계 미국인 감독의 예술 작품은 오묘하다. 완전히 미국적이지도 않으면서, 다분히 미국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인과 한국 문화는 감독의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2023년에 ‘인연’과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로맨스 영화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젊은 감독이 만들 일은 없겠지만, 셀린 송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촌스럽기보다는 다분히 이국적인 매력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12살 이후로 처음 다시 만난 두 사람

동시에 미나리의 스티븐 연처럼, 유태오라는 배우도 너무 한국적이지 않은 한국인 배우라 더 좋았다. 만약 극 중 혜성의 역할처럼 ‘정말 한국적인 남자’ 배우가 연기를 했다면 감독의 색채와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졌을 것 같다. 셀린 송 감독이 그린 혜성이라는 남자의 심리는, 너무도 입체적이어서, 정확한 공감을 위해서 그 사람과 꼭 같은 경험을 할 필요는 없다는 나의 신념을 더 강화시켜 주었다.


내가 한국에 두고 온 열두 살 소녀는 이제 여기에 없어


영화의 절정으로 치닫는 노라와 혜성의 뉴욕에서의 두 번의 만남은 너무도 아름답고 몽환적이어서 노라의 미국인 남편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한국말로 잠꼬대를 하던 그녀의 꿈속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혜성을 배웅하고 이스트 빌리지를 천천히 걸어가는 롱테이크는 그녀가 혜성이라는 첫사랑이 아닌, 한국에 두고 온 어린 자신과 이별을 하는 장면처럼 느껴져서 더 가슴이 아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뉴욕이 많이 그리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뉴욕에 대한 나의 뜻 모를 애정도, 처음 미국행을 꿈꾸던 그 어렸던 마음, 그리고 십 년 전 그때의 우리가 그리워서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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