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러너들
원래는 13km를 뛰고 싶었지만, 컨디션이 그닥 좋지 않았다.
속도를 냈다간 요즘 통 좋지 않은 오른쪽 발목에 무리가 갈 것 같았다.
운동하는 사람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빠르게 알아차린다.
오늘은 정말 펀런을 해야겠다 다짐하고 처음 가보는 길을 뛰었다.
처음 달리는 길은 늘 설렌다.
오른쪽으로 바다를 보며 처음 달린 길은 조용하고 완만했다.
'아 진작에 와볼걸!' 하는 생각.
'여기서 돌아갈까? 한번 더 크게 돌아볼까?' 하는 생각.
몇몇 생각들을 제외하고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게 아니라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1시간 20분 정도를 달리고 나니 비와 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었다.
오늘을 꽉 차게 산 것 같은 그 충만한 느낌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계속 영상5도를 웃도는 날씨 였고 오늘은 9도까지 올라 뛰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온도였다.
문제는 온도가 아니라 미스트처럼 비가 흩뿌리는 날씨다.
며칠 째 이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해는 못본지 일주일이 넘은 것 같고 어설픈 비가 거의 매일 내린다.
정말이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은 날씨다.
11월부터 시작되는 스웨덴의 암흑기(본격적인 어둠이 시작되는 시기. 나는 이 시기를 암흑기라 부른다.)에는 길에 사람조차 줄어 든다.
다들 3-4시 퇴근 하고 나면 운동을 하거나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한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북유럽 국가들이 그래서 인테리어에 진심인 이유다.
가장 어두울 때는 1시부터 해가 지는 느낌이 든다.
문제는 아침부터 해가 아예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아예 해가 나지 않는 상태로
1시부터 어두워져 오후 3시면 완전히 캄캄한 암흑이 된다.
이렇게 어두우면 없던 우울증도 생길 법 한데,
스웨덴은 실제 통계적으로 OECD국가 중 우울증 환자 유병률이 그리 높지 않다.
자살률과 함께 우울증 유병률도 OECD 상위권을 차지하는 한국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다.
스웨덴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알고 행복을 미루지 않는다.
그들은 집을 정돈하고 간소하게 차려 먹는다.
그들에겐 마치 '가족'이 진짜 직장이고 실제 일하는 곳은 세컨잡 같은 느낌이다.
일과 라이프의 밸런스는 전세계 모두가 아는 것처럼 유명하지만 실제로 보면 더 대단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몸과 주변을 잘 돌본다.
이 어두운 암흑을 뚫고 겨우겨우 기어 나가면 어느새 나보다 부지런한 스웨덴 러너들이 줄기차게 지나간다.
그들은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게 뛴다.
그러니까 어딜 가도 누군가 뛰고 있다.
이렇게 날씨가 구리면 안 뛸만도 한데, 정말 얼음이 꽝꽝 언 날씨만 아니면 늘 뛰고 있다.
뛰면 국가적으로 마일리지 코인 같은걸 주나 싶을 정도다.
이렇게 자발적 러너들이 많은 걸 보면 역시나 잘 사는 좋은 나라구나 싶다.
잠을 잘 자는 것이나 요가, 산책, 식물 키우기 같은 자기 돌봄 행위와 비교하자면 그렇다.
날씨의 허들을 뛰어 넘어야 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
매번 적절한 신체적 고통을 경험하는 러닝이라는 행위를 스웨덴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기저귀를 차면서부터 뛴다.
내가 뛰면서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러너들은 100% 나보다 잘 뛰신다.
평생을 뛴 사람들의 마일리지는 감히 이제야 40년 만에 처음 뛰어본 나같은 조무래기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간혹 둘이 뛰는 경우도 있고 더 아주 가끔은 여러명이 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나를 스치고 가는, 내가 스쳐간 러너들은 혼자다.
그들은 비교적 일찍 독립한다.
대체로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파트너라고 부른다)하거나 이별하는 것이 자유롭다.
그들은 굉장히 독립적인 삶을 산다.
그래서 타인의 삶을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걸 가장 극혐한다.
이러한 성향이 스웨덴의 '독립적인 러닝문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한국은 이제서야 러닝 열풍이 불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문제는 숱하게 컨텐츠로 소비되는 SNS다.
정말이지 너무나 피곤하다.
옷은 뭘 입어야 하고, 시계는 뭘 차야하고, 러닝화부터 머리끝까지 온갖 패션 러너들의 컨텐츠와
무릎은 어떻게 해야 하고, 페이스는 어떻게 해야 하며, 미드풋...포어풋...
케이던스는 어떻게...
나는 러닝에 관련된 컨텐츠 알고리즘 지옥에서 나오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정답을 갈구하는 한국사회의 피로함을 빠져나와 보니 알 수 있었다.
타인의 삶 그 자체를 수용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사회.
하물며 뛰는 것조차 정답이 있어야 한다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 정답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수영복을 입고 뛰든, 슬리퍼를 신고 뛰든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느리게 뛴다고, 자세가 이상하다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24년 7월 2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이 아닌,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나는 처음으로 3만원 짜리 나이키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남편 캡모자를 쓰고 달렸다.
40년 평생 남 눈치보기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자유를 맛본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2025년 12월 10일.
1년 6개월 만에 나는 이제 거뜬히 10km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