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교육 관련해서 대화법을 공부하다 보면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경청이라고들 한다.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좋은 대화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잘 듣는다는 건 무엇일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와 마주 보고, 아이의 말에 공감하면서 아이가 이해받는 느낌이 들도록 친절하고 다정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 틀린 구석이 없는, 정말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엄마!"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부른다. 큰 소리로 왜 부르냐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경청해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설거지를 잠시 멈추기로 한다. 아이에게 가려면 고무장갑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고, 고무장갑을 벗어놓고 걸어서 아이방까지 가야 한다. 그래, 난 대화법을 공부한 엄마니까 아이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 해, 아이방까지 가는 것을 귀찮아하면 안 돼, 가서 아이와 얼굴을 마주 보고 다정하게 이야기해야지 생각하며 걸어간다. 아이는 컴퓨터를 하고 있다.
"엄마, 이거 봐봐요. 다이아몬드를 발견했어요!"
마인크래프트 게임 화면이 모니터에 펼쳐져 있다. 마우스를 계속 클릭하며 다이아몬드를 캐고 있다. 내가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아이는 마우스를 부지런히 클릭하며 다이아몬드를 캐고 있었던 것이다. 왠지 아이방에 오기까지의 노력이 무상하게 느껴진다.
'그말 하려고, 설거지하는 엄마를 불렀냐.'
공부한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생각한다. 게임 얼마나 했니, 숙제는 다 했니 같은 말들이 가슴에 차 오르지만 한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정신을 차려본다.
"어머, 다이아몬드 발견했구나아. 엄청 좋겠다."
다행이다. 책에서 배운 대로 아이를 마주 보고 다정하게 '그랬구나아' 말투로 말하는 데 성공했다.
"엄마 다이아몬드 반지 만들어줄게."
"우와, 고마워."
아이의 메타버스적 약속을 들으며, 뭔가 맘이 허전해진다. 그래도 아이는 이렇게 호응해주는 엄마의 말에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어색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대화일까 생각해본다. 마치 프로그램을 따라 말하는 로봇이 된 기분이다.
"엄마 지금 설거지하느라 갈 수 없는데, 무슨 일 있어?"
차라리 이렇게 말했다면 공식을 따라 말한다는 느낌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게 말하는 인간적인 엄마였을 것 같다. 아이와 좋은 대화를 해야지 하면서 '듣는 방법'의 공식을 따라서 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수학시간에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났다. '듣는 방법'의 공식은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마주 보고 이야기하라는 것이나 화내지 말고 이야기하라는 것은 의식하고 행동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가 쉽게 되었다. 이에 반해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개념은 친절하게 이야기하라는 부분이었다. 친절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웃음을 띄면서 또는 적당히 다정한 제스처를 하면서 말해야 한다거나 하는 물리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말에 온갖 부드러운 형용사와 부사와 감탄사를 넣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친절하게 말하기에는 실체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프로그램대로 말하는 앵무새 같은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짜여진 친절함은 진정한 이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좋은 대화라면 엄마만 친절하게 말하느라 힘들고, 아이에게만 달콤한 대화일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도 뭔가 이득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친절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아이말을 잘 들음으로써 엄마에게 생기는 권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엄마가 대답을 하기 위해서 아이의 생각이나 논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의 내면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꼬리를 잡는 일과는 다르다. 냉탕 온탕을 오가는 감정의 영역이 아닌 적당히 건조한 이성의 영역에서만 얻을 수 있는 권리이다. 대화를 계속 연결해갈 수 있는 특권이다. 대화는 앞선 말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엄마인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내가 지금 한 말에 대한 응답을 해주는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
"엄마, 오늘 며칠이에요?"
"오늘? 요새 날짜 가는 걸 모르겠네. 너 참 방학식이 언제지?"
이럴 때도 며칠인지 대답해주는 것이 가장 만족스럽고, 정말 모를 때는 모른다고 이야기해 주는 게 그다음으로 좋다. 아이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 또는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기 위해 날짜를 물어봤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대답하면 바로 엄마의 관심사로 대화가 전환되어 버린다. 아이가 날짜를 알고 싶어 한 이유로부터 어떤 대화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아이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 펑하고 연기처럼 사라진다. 어쩌면 아이의 생각도 같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아이의 생각이 사라지지 않도록 아이가 한 말에 답하면서 그다음 아이가 할 말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 것, 이렇게 대화의 흐름을 같이 타는 것이 바로 친절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에서 배를 탄다고 해서 강의 물줄기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바로 그런 태도가 대화에서 아이의 말을 들을 때 요구되는 친절함이 아닐까. 이렇게 대화할 때 아이가 미안함이나 눈치 보는 마음 없이 편하게 생각과 논리를 보일 수 있고, 그래야 응답하는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