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Netflix <런 온> 16화를 보고 쓰다.
한 때 직장에서 유행하던 콘텐츠가 있었는데, '공부의 신(이하 공신)'들이 나와서 공부방법을 소개하는 영상들이었다. 유난히 자기 계발에 열심인 직원과 학령기 자녀를 둔 직원들의 관심사였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인데, 왜 공신들은 더 많은 양의 공부를 해낼 수 있을까. 영상들을 보면 타고난 유전자를 넘어서는 효율적인 공부방법이 있는 듯했다. 효율적이다 하는 것은 같은 시간에 뇌가 더 많은 공부를 한다는 것을 말하고, 다르게 말하면 뇌가 더 많은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매끈한 직선과 같은 시간이 공신들에게는 요철로 인해 표면적이 엄청 증가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공신들은 다른 차원의 시공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상대성이론이라는 게 과학이라는 학문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실제 삶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만의 시공간을 누리는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지금 나의 시공간에서 지나가는 저 사람은 내 엄지손톱만 하게 보이는데, 저 사람의 시공간에서는 내가 오히려 그렇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 사실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멀리 있는 사람이 나보다 더 크게 보이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 사람이 존재하는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보기가 더 어렵다. 그게 맘대로 되질 않아 어지럽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스스로를 홀로 두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들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먼 곳으로. 그곳에서 쓰는 언어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라면 더욱 혼자가 된다.
오미주 : 뭐, 식당을 가도 그렇고 카페를 가도 그렇고 다 외국인들뿐이니까. 내가 웬만한 영어는 다 들리거든요? 근데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영어를 쓰는 게 아니잖아요.
기선겸 : 그래서 답답했어요?
오미주 : 아니요. 그 외국어의 정확하게 닿지 않는 지점이 오히려 좋더라고요, 저는. 딱 필요한 말만 하면 되니까. 쓸데없는 말 안 해도 되고.
분명 누군가 말을 하고 있는데, 가사 없는 음악처럼 들리는 경험은 여행 중에 행복한 소음이기도 하다. 너무나 세세히 알아듣겠는 말로 인해 의지와 상관없이 해석 회로를 돌리는 뇌를 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들의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오히려 생기는 안도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 섞여있다. 여행이 아니라면, 우리는 계속 그렇게 엉켜있는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오미주 : 우리는 아마 평생 서로를 이해 못 하겠죠?
기선겸 : 응. 서로 다른 사람이니까.
오미주 : 저 사람은 저렇구나, 나는 이렇구나. 서로 다른 세계를 나란히 둬도 되지 않을까?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서로를 이해 못 해도 너무 서운해하지 맙시다. 그건 불가해한 일이고, 우리는 우리여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면 되지.
우리는 서로를 이해 못할 것이라는 말. 보통 이별할 때나 쓰는 말이 아니던가. 연인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서로 다른 세계를 나란히 두자는 이 말보다 더 진심인 고백이 있을까 싶다. 오롯이 서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존중을 담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로 서로의 세계를 함부로 하고,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깨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희생이 되고, 구속이 되고,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지 않고, 서로의 세계를 나란히 두고 서로가 서로여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세계가 스스로에게 안도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고, 그 안도를 서로 인정하고 소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사진출처 : 드라마 <런 온> 공식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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