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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keone Feb 04. 2016

연필/소나기

- 단어로 만드는 이야기들 -

눈앞에 새하얀 도화지가 놓여 있었다. 머릿속도 도화지처럼 하얗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겨우 펜을 집어 들었지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미술시간 과제였다. 


비 내리는 풍경을 그려오라고 했는데 집에는 이렇다 할 미술도구가 하나도 없었다. 연필 하나 만으로 그리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였다. 넉넉하지도 않은데 학교에서 몇 번 쓰기 위해 색연필이나 물감 같은 것을 사 달라고 하기엔 너무 미안했다. 


고민 고민하다가 비를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해 보였지만 도화지가 채워지면서 어색함 하나 없이 재미있는 그림이 탄생했다. 밤새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좋아해 줄 반응을 생각하니 계속 기분이 좋아졌다. 내 그림을 잘 그렸다고 교실 뒤쪽 한 가운데에 내 그림을 걸어놓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애지중지 그림을 들고 학교에 가니 친구들이 예상대로 반응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냐며 자기들이 더 좋아하고 있었다. 시계는 돌아가고 미술시간이 다가왔다. 미술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선생님에게 먼저 달려가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친구들 앞에서 칭찬을 받고 싶어 꾹 참고 기다렸다. 


표정이 굳어버렸다. 선생님의 표정이 굳자 모든 친구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누가 미술시간에 장난을 치냐며 범죄현장의 범인이라도 수색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들 사이를  두리번거렸다. 그 차가운 표정을 보던 친구들은 내가 그랬다며 하나 둘 고발을 하기 시작했다. 


도화지는 누더기가 되어갔다. 내가 긴 연필부터 몽당연필까지 꼼꼼하게 붙여서 비처럼 만들었는데 그 연필들을 단숨에 때어내고 계셨다. 같이 좋아하던 친구들은 선생님처럼 비난을 시작했다. 구석구석에서 내가 선생님 말을 듣지 않는다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내 연필들은 비가 되어 땅에 닿기도 전에 소나기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땅은 메말라있었고 내 마음도 그랬다. 선생님은 때어낸 연필을 한대 모아 나에게 건네더니 새로운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더기가 된 내 그림을 옆에 놓고 따라 그려나갔다. 


잠깐이 지나자 정리된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선생님은 그 그림은 나에게 넘기며 천연덕스럽게 잘 그려왔다고 했다. 공포영화를 보는 것도 아닌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앞으로 이렇게 그리면 된다고 설명하고는 앞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그린 그림과 거의 같은 그림 같아 보였지만 전혀 다른 것이었다. 


중앙은 아니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교실 뒤쪽에 나란히 내 그림이 걸려 있었다. 화장실을 갔다 와서 다시 보니 누가 그림에 장난을 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림들이 비슷비슷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도화지 아래쪽에 이름을 보지 않으면 내 그림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왜였을까. 선생님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시고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한동안 난 그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튀지 않고 평범하게. 아마 친구들도 그렇게 하기 위해 비슷한 미술 도구를 사서 그렸던 것 같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쯤엔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들은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체취처럼 익숙하게 몸에 배어있었다.







누구나 소재 신청 가능합니다. 

아래쪽 글을 참고하시고 신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brunch.co.kr/@ehdwlsez4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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