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때때로 분명 도움이 된다.
일본 드라마 중에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작품이 있다.
아라가키 유이와 호시노 겐이 출연하여 실제 결혼에까지 골인한 꽤 유명한 드라마.
최근 나의 삶을 돌아다보면서 이 드라마의 제목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도망친다'는 것. 누군가에게 뒷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내게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최후의 선택지 같은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더 참고 견디면 이겨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의지박약을 이유로 무력하게 놓아버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패잔병처럼. 실제로 '도망'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는 무력감의 극치에 달해 결국 포기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도저히 섞어들 수 없는 공간에서 내 컬러를 바꾸려고 고군분투한 500일을, 나는 '포기의 가치에 대한 무지'의 결과였다고 말한다.
도망치고 포기하는 것. 우리는 왜 그 단어에 대해 강한 거부감 혹은 부끄러움을 느낄까?
때로 포기하는 것은 영리한 치고 빠지기의 기술이다.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얼른 벗어버리고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이다. 시간과 신체, 그리고 정신 건강을 위해 종종 우리에겐 빠르게 도망치고 다른 출발선에 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포기하면 안된다'라는 어디선가 주입 당한 내면(이라 착각하는)의 소리는 참으로 어리석다.
나는 처음부터 무언가 잘못된 듯한 상황을 느끼면서도, 한번 발을 들였으니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다.
고민과 눈물 속에서 가까운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시종일관 우울한 모습에 주변 사람들까지 지치게 했다.
하지만 500일가량이 지난 어느 순간, 빠른 포기는 적절한 타이밍이었음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빠른 타이밍임을 깨달았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상황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 곰곰이 느끼는 것이라는 점.
물론 그 시간 동안 분명 실질적으로도 많이 배웠다. 삶에서 한 번 정도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때론 포기는 나 자신을 위한 영리하고 용감한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고, 쓸데없이 강해지려고 하는 나 자신에게 두고두고 말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