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 여러 가지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트라우마'의 사전적 의미이다.
나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 그렇지만 사전적 의미에서 설명하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까지는 아니므로 트라우마와 비스무리한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이야 어린아이들에게 '배움'이나 '교육'이란 게 일상을 넘어 과밀이 되어버렸지만, 나 어렸을 때만 해도 학교 교육 말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흔하지 않았다. 반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아이도 몇 명 안 되었다. 그런 아이들은 얼굴도 예쁘고 옷도 원피스 같은 걸 많이 입었던 걸로 기억한다(사실 원피스는 몇 번 안 입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원피스만 입었던 아이로 저장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하게도,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은 쉬는 시간 같은 때 책상 위에서 건반을 누르듯이 손가락을 리듬감 있게 움직이곤 했다. 단순히 피아노 연습을 하는 거였는지, 아니면 '나 피아노 배우는 아이야'라고 알리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아이들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떤 건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동경이었는지, 부러움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무심함이었는지.
그랬던 나에게도 피아노를 배울 기회가 생겼다. 엄마가 없는 살림에 큰 마음 먹고 배우게 해준 거였다. 형제 많은 집 막내였기에 오로지 나만 누릴 수 있었던 혜택이었다. 피아노 학원까지는 아니었고, 우리 집 근처에 고아원이 있었는데,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시는 선생님이 외부 아이들을 대상으로 피아노를 가르치셨다. 나 말고도 여러 명이 배우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수강생 중에는 나보다 어린 친구도 있었고, 내 또래도 있었다. 몇 명이 배웠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기억나는 건 수강생들 중에 내가 두 번째로 못 쳤다는 거다. 제일 못 쳤던 아이는 보통보다는 살짝 지능이 낮은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도, 나보다 늦게 피아노를 시작한 아이들도 시간이 좀 지나면 나보다 다 잘 치게 되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내가 왜 피아노를 못 쳤는지를. 악보 앞에 샵이나 플랫이 붙으면 사장조, 바장조, 가장조, 내림마장조 등 샵이나 플랫의 수에 따라 계이름이 달라진다. 앞에 샵이나 플랫이 몇 개가 붙든 악보대로 치다가 샵이나 플랫이 걸쳐 있는 곳에서 반음 올리거나 내려서 치면 되는데, 그 당시 나는 그걸 몰랐다. 샵이나 플랫이 붙으면 계이름이 달라지니까 건반 위치까지 달라지는 줄 알고 늘 헤매고 잘 못 쳤다. 그당시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게 있어서 매번 선생님한테 혼났다. 다른 아이들 있는 데서 이것도 못 치냐고 무시를 당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트라우마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배울 때 잘 모르면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한테 혼났던 순간이 떠오른다. 한동안 그 감정을 잊고 지냈는데, 골프를 연습하는 요즘 가끔 그때의 감정이 한번씩 올라온다. '아, 이러다 영 못 치는 거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래도 잘 치고 싶은데 잘 안 되니까 그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끔 스쳐지나가는 감정일 뿐이지, 그게 심각하게 내 감정을 갉아먹는다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절대 아니다. 골프는 어렵지만 재미있다. 그때는 어렸고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인이고,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서 마음 먹기만 한다면 알고 싶은 정보가 수두룩빽빽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늘 나에게 도전이자 과제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는 삶을 살지는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