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J는 연남동의 원테이블 레스토랑에 하루 전부터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내 2인의 토요일 저녁 식사를 예약했다. 매우 사적인 공간, 사람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간접 조명이 맛깔나게 차린 가정적인 음식을 비추는 곳이었다. 지나치다 무심코 들어오려 드는 호기심 많고 시끌벅적한 사람들은 거부하는 곳. 같은 성향을 가진 친밀한 사람들이 미리 계획을 세워 초대장을 받은 것 마냥 조심스럽게 방문하는 그런 공간. 그러나 J가 함께 갈 사람은 전혀 친밀하지 않은 사이의 남자였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맞선을 본 남자와의 두 번째 만남을 위한 J의 저녁 식사 예약은 그녀 나름의 테스트였다. 첫 번째 만남은 여의도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의 짧은 점심식사였고, 첫 인상 이상의 것을 알아내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무엇보다 첫 인상이 중요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식당의 입구에서 예약자 이름을 말하는 자신 앞의 그 남자가 자신의 맞선 상대가 아니기를 J는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다. 사람마다 이성에 대한 외모의 취향이 있을텐데, 주변 사람들은 J에게 항상 ‘폐병 걸린’ 남자에게 그만 빠지라고 구박을 하곤 했다. 마르고 핏기 없는 인상의 남자는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리고 자신 앞에서 맞선 상대의 이름을 말하던 그 남자를 보자마자 J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닮았어… 토마스 기차….’
J는 첫 만남에서 토마스와 무슨 맛의 파스타를 먹었는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꽤 인상 깊게 남은 몇 가지 남자의 말이 있었다. 옷이나 악세서리에 관심이 많다는 그녀의 말에 토마스는 호들갑을 떨며 대답하길,
“아하! 제가 그런 걸 진짜 모르거든요. 여자들이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그런 말 하는 게 제일 공포스러워요. 오죽하면 아침에 출근해서 코트를 공용 행거에 걸면, 퇴근할 때 어떤 게 내 코트인 지를 몰라서 주머니에 넣어둔 물건으로 찾는다니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지. 까다롭고 안목이 높은 것보단 수더분한 게 나을 수 있지…’
J의 직업은 주얼리 디자이너였다.
그녀는 취향이 확실했고, 더 문제는 이성을 만날 때도 그런 확실한 취향이 맞을 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가수의 음악을 같이 아는 사람에게,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문장을 뛰어나게 쓰는 작가의 책을 읽어본 사람에게, 좀 루즈할 지는 몰라도 영화 속 한 장면과 대사의 절묘한 어우러짐을 공유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왔다. 그러나 최근엔 그러한 공감대의 허무함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었다.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도, 가치관은 뒤틀렸을 수 있으며, 존중을 모를 수도 있다는 걸 몇 관계를 맺고 끊으며 깨닫고 조금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 뒤로 토마스가 한 몇 가지 말에, J는 그를 한 번 더 보기로 결정했다.
“뭐, 디자인을 전공하다 보니 보통 사람보단 좀 더 자유로울 수는 있겠죠.” 그녀가 말했고,
“세상에 보통 사람이라는 기준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마다 다 다른 건데요.” 토마스가 말했다.
“저는 J씨와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아요. 꼭 연애 대상이 아니더라도, 친구로 계속 보고 싶어요.”
관심사가 맞지 않아도 세상을 향한 눈은 비슷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J의 마음 속에서 싹을 틔웠다. 자신의 관심을 존중하고 흥미로워할 수 있는 태도만 있다면 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맞선을 주선한 J의 엄마가 한 말도 그 생각에 약간의 영향을 끼쳤다.
“네 맘에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맞긴 한데, 너는 너무 까다롭고 눈이 높아. 사람은 다 비슷하고, 진짜 이상하지 않으면 못 맞추는 사람 없다. 솔직히 엄만 네가 웬만하면 이번에 결혼했으면 좋겠다. 벌써 30대 중반이잖니."
‘엄마… 나는 눈이 높은 게 아니라, 눈이 좁은 거야….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도저히 만날 수가 없는 걸.’
입 안에 맴도는 말을 J는 꿀꺽 삼켰다. 부모에게는 대부분 그랬다. 셀 수 없는 부딪힘 끝에 그녀가 선택한 그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포기와 비밀이었다. 뜻이 다른 사람과의 무조건적 사랑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그렇게 그들의 두 번째 식사가 예약되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엉망일 줄은, 그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디자인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 건물의 옥상에서, 일민 미술관의 전시 제목을 바라보며 J가 회사 선배에게 말했다. 그녀는 부모가 모르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뱉었다. 선배가 물었다.
“얼마나 엉망이었길래 그래? 너가 예약한 그 식당, 가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거기 너무 좋죠, 좋았어요. 가기 전에 상상을 했었고, 상상했던 그대로의 분위기라 더 엉망이었어요. 사실 그 곳에 같이 가고 싶었던 사람이 따로 있었거든요. 그래서 더 비참하고 엉망이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