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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터마인 Mar 12. 2019

18. 눈들 - (2)

하루 치 향유 - 필름 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유미와 송은 궁동 벤츠거리 골목에 있는 한 맥주집 앞에서 만났다. 벤츠거리란 충남대학교 근처 사거리에 커다란 벤츠 매장이 있고, 그 매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유미는 송을 기다리며 떠오르는 신진 사진작가인 그를 서울 한남동의 힙한 카페에서 만났으면 좋았으련만. 하고 생각했지만, 멀리서 등을 살짝 굽히고 천천히 걸어오는 송을 보자 인스타그램 속에서 뿜어내던 강렬한 분위기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어 오히려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얼굴 크기만한 생맥주 잔을 다소 힘겹게 들며 홀짝 맥주를 들이켜는 송을 가만히 바라보며 유미가 말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거의 모르는 사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색하지가 않네."

 "그런가? 난 어색한데..."

 "아... 하긴. 나는 너를 지켜봐왔고, 그리고 지금은 너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지만, 너는 나를 거의 모르다시피 하니까. 불쑥 나타난 사람이겠구나 난, 너한테."

 "하지만, 네가 준 사진집은 잘 보고있어. 아직도. 고마워."


 두 사람의 맥주잔이 차츰 비워질수록, 유미는 점점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 작고 고독한 남학생 위에 그가 찍은 광활한 자연의 사진과 푸른 눈, 마지막으로 약 500k의 팔로워까지 더해져 만들어진 그의 이미지와 자신의 눈앞에 실재하는 그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었나? 이렇게 볼품없었나? 얼핏 보면 평범하지만 분위기는 비범하고, 평소엔 조용하지만 가끔 내뱉는 한 마디가 위트있거나 혹은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는. 송은 그런 사람이어야 했던 게 아닌가? 이렇게 내 눈도 못 마주치고, 수줍은 듯 입을 비틀며 순순히 고맙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면, 안되는 거 아닌가? 유미는 송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자신이 상상하고 기대했던 그를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그 순간, 암전이 찾아왔다.


 "여러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세요. 두꺼비집에 문제가 생겼나봅니다. 몇 분 있으면 불이 다시 켜질거예요"

 술집의 사장이 손님들보다 더 당황한 표정으로 홀에 대고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의 묘하게 흥분한 불안의 기운, 왜소한 그의 어깨를 지우는 어둠때문에 오히려 날뛰던 유미의 기분이 다시 차분하게 진정되었다. 그러자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의 어수선함과는 다른 송의 미동없음을.


 "이렇게 깜깜한 데서 맥주를 마시는 건 처음이야, 근데 넌 뭔가 익숙해보인다?"

 "음, 내 눈은 뭔가 잘못된 걸까?"

 "뭐라고?"

 "보이는 색처럼 보는 색도 다르다고 해야할까. 한층 톤이 다운되었고, 한 번 정도 블러처리가 된 듯한 느낌이야. 사실은 네가 준 리차드 미즈락의 사진처럼 자연 가운데에 점처럼 찍혀있는 사람을 찍고 싶었어. 그런데 내 눈 안의 블러가 그 점을 지워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그 점이 어떻게 찍혀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어. 그래서 그냥 인물을 빼낸 풍경밖에 찍을 수가 없더라고. 그러니 이렇게 실내가 어두워진다고 해도 내 눈으로 투영되는 건 밝은 어둠에서 어두운 어둠으로 정도의 차이야. 익숙해 보인다는 너의 물음에 답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게 나에게 익숙한 건 사실이야. 아주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한. 지금껏 누군가 그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적은 없지만."


 유미는 송의 말을 듣고 그의 얼굴로 불쑥,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로의 코가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그러자 그제서야 그에게 당혹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응시하던 푸른 눈에서 또한. 보이니, 네가 지운 무정한 눈들 사이로 가까이 다가온 나의 애정한 눈. 빤히 쏘던 눈을 부드럽게 휘며 유미는 말했다.


 "술을 좀 더 마실까봐."


 둘은 그 근처의, 여전히 그닥 섬세하게 꾸며진 곳은 아니지만 좀 더 좁고 테이블마다 칸을 나누듯 벽이 세워진 구조로 되어있는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겼다. 인테리어와 메뉴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그 가게에서는 의외로 꿀에 절여진 상아색 배절임이 기본안주로 나와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소담하게 놓여졌다. 포크에 힘을 꾹 주어 조금 큰 조각의 배를 자르려고 애쓰며 유미가 말했다.


 "진짜 배처럼 애매한 과일도 없는 것 같아."

 "그래?"

 "참외처럼 완전히 하얀 것도 아니고 말이야. 사과처럼 일상식에 끼워넣을 수 있지도 않잖아. 그렇다고 딸기나 무화과처럼 제철이 있어서 시즈널 메뉴로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맛도 마찬가지야. '배 맛' 이라는 거, 왠지 바로 상상되지 않아. 왜인지 생각해봤는데, 배즙과 배의 맛이 달라서가 아닐까. 포도즙은 포도 맛이고 사과즙은 사과 맛인데 도저히 배즙은 배 맛이라고 보기가 힘들단 말이지. 나에게 배즙은 마치 배가 아닌 다른 제3의 과일을 갈아넣은 맛이야. 그러니까 배를 먹다가 배즙을 마시면 갑자기 낯설어져. 내가 알던 배가 아닌 느낌. 정말 모호해. 그 누구도 딱히 배를 싫어하진 않지만,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꼽는 사람도 본 적이 없어."

 "...배에 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은 너 하나 뿐일거야. 거의 배가 감동할 수준이야."

 "헷, 나는 배에 대한 애정이 있지. 언젠가 집에 있는 배를 먹다가 조금 나같나, 했거든. 절대로 배를 사먹은 적은 없어. 배를 먹을 때는 이미 집에 있거나 선물로 받았을 때 뿐이야. 대체 마트에서 누가 사오는 걸까. 분명 엄마나 아빠가 사왔겠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긴 힘들어. 그런게 왠지 나같아. 분명 두 사람이 사랑해서 나를 낳아 키운걸텐데, 처음부터 아무도 가져오지 않은 채 그냥 집에 놓여있었던 느낌이야. 이름조차 성의가 없어. 유미가 뭐야, 유미가. 나도 좀 더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지는 이름을 가지고 싶었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유미들을 봤는지 넌 모를거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 눈에 띈다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이기도 해... 그러니까 애초부터 독특한 이름이었다면 두려워도 어쩔수 없지 하고 숙명으로 받아 들일텐데. 이제와서 스스로 개명할 용기는 없는거야."

 이자카야로 옮기고 나서 유미는 급격하게 술이 올라온 듯 했다. 그녀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너의 사진에 비치는 눈은 지금까지 나를 봐오던 눈들과는 약간 달라. 완전히는 아니고 약간 다른데, 그 변화가 꽤 크게 나타나지. 뭐가 다르냐면 말이야. 판단을 하지 않아. 나를 칭찬하지도 비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무심하지도 않게 가만히 나를 바라봐. 그러니까 보통은 누군가 나를 바라보면 내가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너의 눈은 판단하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안하게 돼. 그러다보면 내가 나를 바라보게 된다. 그거 알아? 너의 사진을 좋아해서 샀던 사람들이 너의 눈이 싫어서 그걸 버린다는 거..."

 송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사진전이 끝난 얼마 후 몇 작품이 반환되었다. 이유는 개인사유로, 딱히 환불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어디에 버리기는 꺼림칙했는지 '받든 말든' 하는 느낌으로 그 작품들은 전시 담당 사무실에 택배로 부쳐졌다. 환불을 요청한 고객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한국인이라는 점이었다. 유미와 달리 전혀 취하지 않은 송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도 너를 바라보게 하는 그 눈을 싫어해?"

 들은 건지 아닌지, 유미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넌 정말 다른 사람과 달라. 학교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어떤 삶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르게 태어난 사람의 삶이란 건."

 "글쎄, 의외로 다르지 않아. 사람은 모두 다르니까 내가 다르게 태어났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송은 이미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듯한 유미의 말에 필요이상으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이 말도 들었는지 아닌지 모르게 그녀는 말없이 드디어 뚝 잘라진 배절임을 입에 넣고 씹었다. 송은 작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가게 바깥의 건물 반 층 위에 있는 하얀 철문의 화장실은 누군가 들어가 있는지 안에서 문이 잠겨있었다. 문 앞에 서서 사람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귓가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자 유미가 자신의 바로 뒤에 붙어서서 아이폰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발갛게 술이 오른 얼굴로 그녀가 씨익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니 뒷통수, 찍고 싶게 생겼네. 동글동글."


  송이 지금처럼 돌아서 있으면 그인 줄 모르고 지나칠 수도, 라고 유미는 생각했었다. 그가 유별난 사람인 듯 떠들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남들과 다른 건 푸른 눈동자 하나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화장실로 그를 따라와 문 앞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동글동글, 단단한 밤톨같은 그의 뒷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어긋남 없이 둥그런 뒷통수라면 뒤에 서서도 송인줄 알 수 있을 거야. 만약 앞에서 그를 본다면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공기를 뾰족하게 뚫고 뻗어나오는 그의 눈 색깔을 보고 한 번쯤 더 힐끗 쳐다보겠지만, 뒤에서 그를 본다면 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무심히 그를 스치고 오직 나만이 저 매끈한 밤톨을 알아 볼테지. 술 때문인지 갑자기 뭉글한 기분이 되어 유미는 조용히 그에게 더 다가갔다. 그리고 주머니 속 아이폰을 꺼내 찰칵, 하고 그의 뒷통수를 찍었다. 화장실의 하얀 철문이 마치 스튜디오 벽처럼 피사체를 둘러싸 카메라 렌즈가 송의 두상을 뚜렷이 담아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때 아직 카메라 모드가 켜진 채 흔들 거리는 액정의 화면이 바뀌며 통화 수신을 알렸다. 유미는 화면에 뜬 이름을 힐끗 본 후 수신 거절 버튼을 눌렀다.


 발신인은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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