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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pr 29. 2022

부활절과 계란 장조림

밥 차리는 것을 즐거워하려고 애를 씁니다 - 코시국 집밥기록


해피이스터! 부활절 아침 구운 계란 냄새가 온 집안에 구수하다.


어렸을 때에는 부활절이면 계란을 삶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곤 했었다. 특정한 음식으로 기념이 되는 날들이 몇몇 있다. 1월 1일엔 떡국, 발렌타인데이엔 초콜릿, 부활절엔 계란, 복날엔 삼계탕, 명절에는 전,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 등. 한동안 이런 날마다 매번 먹는 음식들이 진부하다고 생각되어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한 10여 년 전쯤부터였나, 때에 맞는 음식을 찾아 먹으며 기념하는 것이 참 의미가 있는 것이구나 배우게 된 계기가 있어서 이제 다시 절기 음식들을 잘 챙겨보려 하고 있다. 그 시작은 땡스기빙에 터키를 먹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을 지키긴 하지만, 온 민족이 다 지키는 명절은 아니어서 한국에 사는 동안에는 그 절기가 큰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총 3번의 땡스기빙을 경험했다. 미국에서 만난 친구가 알려주기를, 땡스기빙은 그저 배터지게 먹는 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 생각엔 배보다 가슴이 터질 듯하게 따뜻하고 기쁜 날이었다. 예전에는 터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었다. 닭보다 퍽퍽한 느낌의 칠면조 고기가 맛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별로 없었다. 음식의 맛은 분위기를 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한강 편의점에서 먹는 컵라면이나, 한겨울 포장마차에서나 먹는 꼬치오뎅을 집에서 먹으면 그 맛이 그 맛이 아닌 것처럼, 꼭 그 장소 그 분위기에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들이 있다. 땡스기빙날의 터키는 정말 정말 맛이 있었다.  


미국에서 처음 만나 알아가며 함께 지냈던 유학생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귀국을 했다. 우리는 귀국 후에도 한동안 매년 땡스기빙이 되면 모여서 터키를 주문해 함께 먹었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그 절기와 음식을 즐겼다.


한국의 설, 추석 명절이 결국 미국의 땡스기빙과 같은 풍성한 명절인데도 내가 평생 경험했던 우리나라 명절의 식탁이 고작 4년여를 경험한 미국의 땡스기빙보다 덜 그립게 느껴졌던 것은, 명절이면 늘 힘들게 음식 준비를 해 오신 엄마에 대한 기억, 그리고 엄청난 양의 명절 음식이 몇 날 며칠이고 남아 그 음식을 한동안 질리도록 먹어야 했던 기억이 (명절이 끝나고 나면 나뿐 아니라 반 친구들의 도시락 반찬이 꽤 오랫동안 '전'이었다) 그렇게 좋게 남아있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사실 식탁으로만 따지면 한국의 설과 추석이 땡스기빙보다 더 풍성하다. 갈비찜, 잡채, 전, 산적, 탕국, 떡, 식혜, 수정과, 온갖 과일 등. 나도 결혼 후에는 어쩔 수 없는 차례상 위주의 일거리를 담당해야 하는 며느리 모드 신세이지만, 나에게 어느 정도 주도권이 생기는 시기가 오면 우리 가정의 설과 추석은 미국에서 내가 느꼈던 땡스기빙과 같은 느낌의 절기로 만들고 싶다. 가족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풍성하게 차리고, 혹시 혼자 지내느라 명절 음식을 맛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주변 지인이 있다면 초대해서 함께 음식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내가 미국에서 이방인이었을 때 누군가가 그렇게 나를 챙겨주고 대접해주었던 것처럼.




절기 음식 얘기를 하다가 본론보다 서론이 더 길었다. 아무튼 오늘은 부활절이고, 그래서 계란을 구웠다. 기념으로 에그페인팅을 할 계란 몇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 계란은 조려서 계란장조림을 만들었다.


계란 장조림은 삶은 계란보다 이렇게 구운 계란으로 하는 것이 더 쫄깃하고 맛있다. 계란 껍질을 벗기는 것도 구운 것이 더 쉬워서, 나는 보통 계란을 삶기보다 굽는 편이다. 계란 장조림은 먹기엔 간단한데 계란을 익히고, 조리기까지 시간은 꽤 걸리는 반찬이다. 그래서 다른 반찬은 시간과 공수가 크게 들어가지 않는 것들로 차렸다.


냉장고에 파스타를 해먹고 남은 참나물이   정도 남아있어서, 동생네 시가에서 직접 짜서 보내주신 참기름을 넣어 무쳤다. 시판용 참기름에서는 절대 느낄  없는 진한 향이다. 참기름과 참나물의 향이 만나니 다른 양념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며칠  볶아놓은 진미채볶음이 아직 딱딱해지지 않고 촉촉하다. 마지막으로 훈제오리 반마리를 꺼내 구우니 부활절 아침 소박한 아점 식탁이 완성됐다.


부활절마다 계란장조림을 해 먹는 것도 괜찮은 전통이 될 것 같다. 사실 부활절이라고 계란을 여러 개 삶아두기만 하면 잘 먹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조려 두면 손이 잘 가는 밥반찬이 된다. 매년 부활주일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이런저런 행사를 하고 들어오면 늦은 오후나 저녁이 되었었는데, 올해는 코로나 덕분에(?)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바람에 사부작사부작 계란을 굽고 장조림을 조리고 에그페인팅을 하며 소꿉장난하듯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내년 부활절에도 아침에는 우선 계란을 구우면서 시작해야지. 명절 때 기름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듯, 부활절에는 계란 굽는 냄새가 가득한 집. 우리집의 전통으로 만들고 싶은 부활절 바이브.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2020년 초부터 조금씩 해 두었던 밥상에 대한 기록과 그 기억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하나씩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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