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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y May 09. 2020

조용한 고발 1

soak in tears 

사는 게 바빠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아무런 취미 생활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 후 일과 육아에서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악착같이 온전히 나를 위해서 쓰겠다며 넷플릭스 에피소드들을 순회하며 늘어져있거나 Rated R (19금) 딱지가 붙고, 욕이 많이 나오는 티브이쇼라도 봐야지 스트레스가 풀렸다. 


결혼 후 남편과 정말 징그럽게도 싸웠다. 이런 싸움들이 반복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오래되는 신경 전이 지쳐서도 내 생각을 설명해야 하는 싸움 자체가 힘들어서도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끊임없이 실망하며 억지로 보지 않으려고 무시했던 이 남자의 단점이 넘기기 어려워지고, 남겨두고 싶던 이 남자에 대한 환상(백마 탄 왕자님이길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길 바랬다)이 자꾸 깨져버리는 것이 너무 슬프다. 나에게는 죽음까지 하나밖에 없을 남자인데, 앞으로 평생 사랑해야 할 이성의 존재인 내 남자가 이렇게 실망스럽고 별로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피하다 마주하는 매일의 현실에서 다시금 확인을 하게 되면서 결혼이 무겁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대로 내 인생은 끝인 걸까.. 


사랑을 베풀고 받으면서 살고 싶었다. 외향적이고 털털한 성격이라 많은걸 바라지는 않는다. 소소한 관심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느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연애 이후로 그런 행복은 내게서 없어진 지 좀 된 것 같다. 가끔 아무 조건 없이 보듬어줄 이성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가 엄마가 되었으니 접어두자 마음먹는다. 


이번 싸움은 내상이 꽤 크다. 바닥까지 떨어져 버린 이 마음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모르겠다. 편찮으신 와중에 걱정스레 물어보시던 시어머니께는 현명하게 잘 풀어보겠다고 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사람에게 실망했기에... 마주 앉아 여자는 원래 힘든 거라는, 우리 가정은, 나의 자녀 교육 방침은 말씀하시던 어머님 말씀도 귀에 윙윙 날아다니는 벌 소리 같았다. 결과물을 내가 보고 있지 않은가.


5월이 되자마자 부탁했었다. 양가 생신은 내가 챙길 테니 어버이날 카네이션은 남편이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이 쓰여서 나는 나대로 케이크도 맞춰두고 예쁜 용돈 봉투에 카드까지 써두고 양가 부모님들이 따듯해하실 것을 생각하며 들떠있었다. 올해 들어 얼굴 한번 비 친적 없는 사위를 오랜만에 보시면 친정부모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 내가 하는 효도랑은 다른 기쁨일 테니 딸자식이 든든한 사위와 외손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면 걱정을 한시름 덜어놓으시지 않을까. 시댁에는 아들 멋지게 키워 얻은 착한 며느리가 드리는 사랑의 기쁨을. 늘 딸 걱정이 많으신 친정 부모님께는 사위가 선물한 카네이션과 안부 인사를 5월이 되기 전부터 나는 가족들과 마음을 주고받을 생각에 참 행복했었다. 


어버이날 며칠 전에 남편이 시어머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니 어버이날과 어머님 생신 모두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내 상식에는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 더욱 찾아뵙고 손도 잡아드리고 반찬도 좀 해다드 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뵈러 가겠다고 했다. 다음 날 친정에는 언제 인사 가는 것이 좋겠냐고 물어봤더니 "꽃 보냈으면 됐지 귀찮게-"라고 하는데 귀를 의심했다. 지켜온 모든 것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지난 싸움들로 이미 탁해진 남편의 모습이 바닥에 세게 떨어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말이 워낙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속은 따듯해', '표현이 서툰 사람이니 내가 더 웃으면서 보듬어 줘야지' 단점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이 남자를 사랑했는데, 나는 또 등신 짓을 하며 나를 희생했구나. 


너무 화가 나서 "어머님께서는 당신이 늘 조용히 책을 읽고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으니 당신을 착하다고 하셨지만, 당신은 이기적이고 남을 위해 조금도 희생할 수 없는 사람이다. 결혼을 했으면 어른이 되어야지 내 기분대로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부모를 챙기는 것이 사람의 기본인데 아이가 무얼 보고 배우겠어, 아침 먹고 출근해서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주는 게 사람이 사는 이유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우리 부모님께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란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다면 '바쁘고 여유가 없어서 저렇게 표현하나 보다' 이해라도 해보려 했을 텐데... 내가 개차반처럼 할 테니 너도 나를 따라 개차반으로 하라는 뜻이냐고 물었다. 나쁜 건 고치고 좋은 쪽으로 두 사람 모두가 발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나중엔 귀찮다는 말은 한 적이 없고 찾아뵙지 않겠다고는 했단다. 나는 들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귀찮게"라고 했다. 금요일이 어버이날이지만 주말인 토, 일 중에 언제 시간이 괜찮냐고 물어볼 때도 돈 빌리러 온 사람 같이 나를 대했다. 반년이 지나도록 처가에 인사 한번 간 적 없는 사위가 어버이날을 맞아 차 한잔 마시는 게 내가 이렇게 쩔쩔매야 하는 일인가.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남자에게 나의 아들은 어떤 남자다움과 사람다움을 배우면서 클까. 나는 결혼을 했으니 시부모님 아주버님 형님들 조카들까지 내 가족인데, 이 사람은 친정 부모님 끌어안는 게 그렇게 여유가 없고 버거운 일인가. 이 사람이 자기 몸 말고 세상에 챙길 줄 아는 것이 있을까.  


내가 시아버님 생신 때 13인분 음식을 하고 60만 원짜리 옷을 선물할 때도 남편은 수고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고 돈을 보태주지도 않았다. 친정어머니 생신 때는 맨몸으로 참석만 한 2시간 코스가 끝나기 전 식사 도중에 일어나 가야 한다고 했다. 친정아버지 생신 때는 다녀와서 체했다며 불 끄고 방에 누워 저녁 내내 눈치를 줬다. 



같이 살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혹시 우리 사이에 어떤 끝이 있더라도 내가 즉흥적인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해서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진심으로 너무 실망을 해서 이제는 얼굴을 쳐다보기가 힘들다. 경멸이 섞인 표정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린다. 하루는 애써 다녀와, 다녀왔어 이야기하다가 하루는... 입이 안 떨어져서 재택근무에 집중하는 척을 한다. 싸웠을 때도 아침을 차리 주면 먹고는 갔는데, 지금은 차린 밥도 두고 간다. 이해를 해볼 수 있게 설명이라도 해달라고 했는데 암말 않고 있다가 코를 골며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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