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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주먹을 휘둘렀지만 졌어

by 삐딱한 나선생 Feb 07. 2025

남자는 군대를 다시 가는 꿈이 제일 무섭다고들 한다.

아내는 필기구도 없고 공부도 안 했는데 시험장에 있는 거란다.

난 여전히 학창 시절 센 친구들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장면이 꿈에 나온다.



억눌린


숨어있지만 적은 내게 다가온다.

도망가고 싶지만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당당히 싸우고 싶지만 꿈속의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20대까지는 거의 이런 패턴이었다.

내 꿈인데,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나는 어른이 되었는데, 왜 꿈엔 작고 약한가.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분노로 덜덜 떨렸다.

의식이 들고서야 뒤늦게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꿈에 나온 나쁜 놈보다 아무것도 못한 바보 같은 내가 더 나를 열받게 했다.


복수의 의지를 가지고 꿈의 끝자락을 떠올렸다.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옅은 잠에 자각몽 비슷하게 되었다.

이렇게 10년 이상 수련하니 드디어 주먹을 휘두를 수 있었다.



통쾌함


내 주먹은 강력했다.

돌려차기도 날아 차기도 했다.

이제 대부분의 꿈에서는 내가 이겼다.


속 시원한 학원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학교 짱은 아니어도 '힘숨찐' 정도는 되었다.

이제 내 꿈의 존재들은 날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정당한 응징을 한다는 건 정말 통쾌한 기분이었다.

내가 나의 통제권을 갖고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내 과거를 극복한 것도 같았다.


그렇게 얼마 전에도 주먹을 날렸다.

내 주먹은 상대에게 정확하게 꽂혔다.

눈을 떠보니 그건 옆에 자던 첫째 딸이었다.



막막함


놀라서 꿈도 잊고 미안해 미안해 달랬다.

첫째는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그나마 팔꿈치 쪽에 맞아서 다행이었다.)

아이가 다시 잠들고 이 글을 메모했다.


꿈에서 깼지만 아직도 분노가 남아 있다.

다시 돌아가 주먹질을 더 하기엔 현실이, 내 딸이 위험하다.

또한 꿈에서 분풀이를 할 수는 있어도 좋은 이야기를 맺지는 못할 것 같다.


과거를 극복하고 꿈에서나마 이겨냈다고 생각했건만.

이건 아무리 때려도 이겨도 이긴 것 같지가 않다.

내 방식은 거칠고 결말은 막막하기만 하니까.


또 힘든 일은 생길 거고 꿈에선 어떤 두려움으로 나타나겠지.

이제는 좀 더 성숙한 승리를 수련해야 할 시점인가 보다.

결국 꿈은 내 정신이 보여주는 영화와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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