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이 시대의 화두… 라고 하기에는 한 10년은 지난 것 같다. 그사이 ‘내로남불’은 정치인의 당연한 덕목이 되었고, 과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닌 플렉스가 되었다. 겸손이 동아시아의 미덕이라는 건 적어도 한국에서는 옛말이 됐고, 한국은 이제 세계 사치품 브랜드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가가 됐다. 공정하게 불공정해진 사회에서 공정이라는 가치는 점점 우리를 옭아맨다. 정치인들은 인기를 위해 모든 사안에 공정을 들먹이지만 한 달도 못 가서 과거 발언이나 행동이 밝혀져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성난 민심은 그들을 처단한다. 돌고 돌아 내로남불, 아니 돌고 돌아 공정.
공정 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도 스스로가 별로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학업도 일도 연애도 가족도 늘 내 능력 이상의 것을 얻었다. 세상에는 나보다 열심히 사는데 나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이 발에 차이게 많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것은 분명 원주인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훔치며 살아왔다. 그러니 공정이 내킬 리가 없지.
물론 공정은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그것은 과정이지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여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지금의 공정 담론은 마치 공정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어떤 일이든 결과적으로 그것이 공정한가 아닌가를 따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정이 목표가 되는 순간 공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면 공정은 이미 사회가 세워놓은 가치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공정을 외칠수록 체제는 더 공고화되고, (돈이든 권력이든 외모든 실력이든) 이미 가진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더 과신하며, 공정은 실현되지 않는다.
완전 공정하게 최고의 피지컬을 찾아라?
“체급, 성별, 국적을 불문하고 최고의 피지컬을 가린다.” 최근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피지컬: 100>이 내건 모토다. 모토에 맞게 운동선수, 격투가, 특수부대원, 산악구조원, 피트니스 트레이너 등 신체 활동이 강조되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그 안에서도 상위 1%의 신체를 가진 참가자 100명이 등장한다.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고, 아주 적지만 외국인도 있다. 특정 신체 부위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왜 하나도 없나 싶지만, 뭐 일단 넘어가자. 아무튼 그 모두가 게임에 참여해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경기를 펼친다.
솔직히 처음 <피지컬: 100>의 콘셉트를 들었을 때 ‘딱 별로’일 것 같았다. 젠더 문제를 포함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을 그 수많은 논란을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방송이 업데이트 되자마자 그 논란은 여지없이 벌어졌다. 나는 보지도 않은 채 인터넷의 그 수많은 논란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이 게임이 가진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지적했다. 그런데 나는 그 논란 때문에 오히려 이 프로그램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흥미로운 건 공정을 가치로 내건 이 게임이 태생적으로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완전 공정하게 최고의 피지컬을 뽑는 방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신체의 발달 정도는 다르다. 같은 운동선수라도 종목에 따라 상체가 발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체가 발달한 이가 있고, 순간적인 파워나 스피드가 높은 사람도 있고, 지구력이 좋은 이도 있다. 그러면 어떤 게임을 하느냐에 따라 게임의 승패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는 제작진이 주장하는 ‘완벽한 신체’와는 거리가 멀다. 어차피 참가자들은 상위 1%로 신체를 단련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남은 건 시스템, 대진표, 컨디션, 무엇보다 대결 순간의 운이다. 게임 종목을 바꿀 필요도 없이 이 프로그램 안에서 벌어진 게임의 순서와 대진표가 조금만 바뀌었어도 우승자는 달라졌을 것이다.
제작자들이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프로그램은 자신들의 모토와는 달리 공정한 게임이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아무런 배경이나 도구 없이 오직 신체만으로 대결한다고 강조하지만 그 신체는 전혀 공정하지 않다. 실제로 신체에 약물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참가자들도 몇 등장한다. 물론 그 분야에서는 약물 사용이 흔한 일이기에 그것 자체가 비난 요소는 아니다. 다만 공정의 가치와는 조금 어긋나 있다는 거다. 이쯤에서 이 프로그램 자체가 세상의 이면에 대해 대놓고 ‘디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프로그램의 진짜 의도가 궁금해서라도 안 볼 수가 있나.
그렇게 <피지컬: 100>을 봤다. 그리고 플레이 타임 내내 내 눈에 들어왔던 건 그 수많은 논란이 아니었다. 참가자들의 땀이었다. 인터넷이나 언론에서 떠들던 논란은 생각보다 시시한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 땀이 너무 강력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모니터로 그 냄새와 열기가 뚫고 나올 것처럼 땀이 쏟아져 내린다. 남자든 여자든, 운동선수든, 내추럴 보디빌더든 케미컬 보디빌더든 게임에 몰입해 모두 미친 듯이 땀을 흘린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기는(글을 쓰는 시점에서 6화까지 공개됐다) 열 개 팀 중에 최약체로 뽑히던 장은실 조가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조를 제친 ‘모래 나르기’ 게임이었다. 그때 참가자들이 느낀 희열은 내게도 온전히 전달되어 나는 방송을 보다 그만 소리를 질렀다. 다른 시청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누구나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는 스토리였으니까. 아마 모두 한마음으로 다윗을 응원했겠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최고의 신체를 뽑는다는 취지는 무너진다. 약한 참가자가 경기를 뒤집는 드라마 속에는, 어쩌면 우승했을지도 모르는 이가 ‘불공정’하게 떨어지는 과정이 포함된다. 공정을 원하는 시청자라면 당연히 화를 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게임에 불만을 표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공정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나는 그 게임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이든 인생이든 애초에 공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도 얼마든지 게임을, 그리고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모래 나르기 게임에서 참가자 전원은 정말 미친 듯이 땀을 흘린다. 승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감동받았던 건 그들의 노력이다. 아마 그 게임에서 장은실 조가 졌다 한들 내 감동이 줄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프로그램이 내건 모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스스로 자신들의 모토를 뒤엎는다. 공정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설계하든 승자는 실력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운이 모든 것이니 비아냥거리고 자포자기할 수도 없다. 왜냐면 그 과정에는 누군가의 땀이 있기 때문이다. 승자는 운이 좋은 사람이겠지만, 감동은 땀을 흘린 사람이 준다.
이 프로그램에는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경쟁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캐릭터 구축이 없다. 그 때문에 시청자들은 원래 각 출연자에 가지고 있던 호불호를 그대로 가져올 수밖에 없고, 모르는 인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기 힘들다. 이는 콘텐츠를 보는 입장에서 명백한 마이너스다. 하지만 나는 제작진들이 일부러 그런 방식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중요한 건 그 순간 흘린 땀이니까. 캐릭터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그 사람이 이전에 어떤 운동을 했든, 무슨 배경을 가졌든 그건 베이스일 뿐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스토리와 배경을 가지고 산다. 당신이 아무리 땀을 흘려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 더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 변명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뜨겁게 살아간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배신을 하는 것조차 너무 뜨거워서 누구도 함부로 비웃을 수 없게 한다.
글. 오후(oh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