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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pr 04. 2023

은하수처럼 찬란히 펼쳐지는 인연의 실

<성한찬란>

각 문화권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가 다 비슷한 성격을 띨 리 없지만, 한국의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중국 드라마 중에는 우리나라 주말드라마의 흐름과 미니시리즈의 인간관계를 동시에 지닌 작품이 많다. 이런 특성은 아마도 중국 드라마가 다른 문화권의 드라마에 비해 대체로 장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50편이 넘는 중국 고장극(고전 의상을 입는 드라마라는 뜻으로 사극을 가리키는 말)은 사건의 스케일은 거대하되, 이를 묘사할 때는 주변 인물까지 하나하나 자세히 훑는 방식을 쓴다. 이런 특성이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 반면 새로운 팬이 유입하기에는 진입 장벽이 높다고 여겨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 중국과 한국의 정치·역사적 관계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날카롭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봐야 하는 장면도 많다. 이런 맥락 속에서도 장대한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매료하는 몇몇 드라마가 있고 <성한찬란>(아시아앤 방송, 쿠팡플레이 제공)도 그중 하나다.

<성한찬란> 포스터

2022년 여름 중국 위티비(WeTV)에서 방송해 중국 내에서도 화제가 모은 드라마 <성한찬란>은 1막, 2막을 합쳐 총 56부작으로 정씨 집안의 막내딸 정소상(조로사)과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 이름 높지만, 냉정한 장군 능불의(오뢰) 사이의 험난해서 더욱 찬란한 인연을 그린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온갖 역경을 헤치고 나가는 두 사람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극인 동시에 중국 고장극의 주요 장르인 궁중 암투극 성격과 과거의 음모를 밝히는 정치·복수극적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전장에 출정하는 탓에 홀로 남겨진 소상은 이기적인 할머니와 매정한 숙모 손에 길러져 사랑을 모르고 자란다. 소상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어머니는 글공부도 하지 못하고 말괄량이로 자란 소상을 엄격하게 대한다. 냉정한 어머니에게 실망한 소상은 자신만의 삶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한편, 병기 횡령 사건을 수사하는 능불의 장군은 자신의 수사에 도움을 주는 얼굴 모르는 낭자인 소상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두 사람은 마침내 신년 연등회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한다. 능 장군은 화재로 위험에 처한 소상을 구하며 첫눈에 반하지만, 그 마음을 고백하고 두 사람이 연인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무려 20회 가까운 회차가 지나야 한다. 


사람의 인연이란 아름다운 음악 같은 

<성한찬란>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녹비홍수>의 원작자, 관심즉란의 또 다른 소설이 원작이다. 드라마 <녹비홍수>도 잘 만든 고장극이지만, <성한찬란>과는 이야기의 결이 다르다. <녹비홍수>는 서녀로 태어나 처첩 간 갈등에 휘말려 온갖 설움을 받고 자란 명란(조려영)이 명민한 두뇌와 단련한 인내심을 이용해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후작가의 정실이 되어 자신의 삶을 개척해가는 이야기다. 일일극이나 여성 중심 사극의 주요 소재이기도 한 궁정 혹은 대갓집 암투극은 다양한 성격을 가진 여성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욕망을 실현하려고 각종 책략과 기지를 동원하는 구조를 띤다. 이런 극은 여성 서사로서 주체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긍정하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장르다. 사회적으로 불리한 여성의 도전은 남성 권력자의 승인을 받고 가족제도 내로 편입되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Unspalsh

<성한찬란>도 사극인 만큼 어쩔 수 없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긍정하지만, 이야기의 핍진성이나 인물 구성의 정교함을 덜더라도 여성 인물의 주체성을 좀 더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방임 상태에서 자란 소상은 사랑을 모르지만, 그 대신 온갖 기계 장치를 잘 다루고 받은 만큼 되갚아주는 성격을 갖고 있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도 ‘얼마나 자기답게 살아가느냐.’에 초점을 두며 엄격한 원칙주의자인 군인으로 불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소상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며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능 장군이지만, 그 또한 사랑한다는 이유로 소상이 자기 뜻에 따라주기를 바란다. 능불의를 사모해 질투하는 궁의 여인들 틈에서 소상이 고군분투할 때는 궁중 암투극처럼 흘러가는 부분도 있지만, 불의가 밝혀내려고 하는 15년 전의 음모에 휘말리면서 소상의 삶은 궁정 담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저 멀리 전장까지 뻗어나간다. 

한편, <성한찬란>은 진정한 사랑을 모르던 소년 소녀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어릴 적 부모가 자기를 버려둔 채 오빠들만 데리고 가서 친척에게 학대받으며 자란 소상,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재혼하고 어머니는 미쳐버린 환경에서 왕의 양아들로 자란 불의. 게다가 그에게는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도 있다. 둘 다 어려서부터 외부의 위협에 맞서 자기를 스스로 지켜야 했던 탓에 타인에게 마음을 쉽게 내주지 못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도 어렵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못하는 한 사람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이를 통해 두 사람은 타인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진실을 공유하지 못한 연인은 죽음보다 더 깊은 이별을 맞기도 하지만, 어떤 고난에도 서로 잊을 수 없었기에 다시금 사랑을 재건하려 한다. 

<성한찬란>에서 주인공 소상의 이름은 중국의 고전 현악기 구친(고금)의 일곱 번째 현인 소상현에서 유래했다. 아름다운 음률을 내는 악기의 줄이지만, 극 초반에 소상이 불의를 구해 화살촉을 빼내는 장면에 쓰이기도 했다. 보통 실보다 훨씬 강도가 높아 쉽게 끊어지지 않는 소상현은 후에 불의와 소상의 질긴 인연을 상징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서로 상처를 받고 돌아선 상황에서도 불의는 이때 자신의 목숨을 구한 소상현을 늘 손목에 감고 다니며 소상을 가슴에 품는다. 이처럼 <성한찬란>은 사람의 인연이란 음악처럼 아름다우며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비로소 자신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의 성정이기도 하다. 즐거울 때는 밝은 음악 소리를 내고,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사람만이 결국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다. 정치극이자 로맨스물이며 성장담인 <성한찬란>이 전하는 메시지다. 


글.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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