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헌터 통해 제안을 받은 날짜가 4월 중순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으니 새로운 곳을 준비하고 면접을 보는 일정 또한 1개월 반이 지났고, 6월 중순 입사를 하게 되면 첫 면접 후 거의 2개월이나 흐른다.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비교적 여유 있는 일정이 현 회사와 몸과 마음이 작별할 시간을 충분히 만들어주었다.
올해 초, 두 팀장급 상급자가 퇴사한 적 있었는데, 아주 요란스럽고 화려했다. 무려 세 달이나 걸쳐 '퇴시할 것이다'를 필두로 면담과 토로와 새로운 곳에서의 기대감을 표출했고, 심지어 마지막 한 달은 회식을 해도, 차를 마셔도 대화의 마지막은 꼭 현 회사에 대한 힐난으로 귀결되었다. 아무리 하급자여도 현 회사에서 계속 일 할 사람들이 있는데(심지어 모두 첫 칫장)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퇴사를 보며 나는 치를 떨었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 퇴사를 통보하고 내부적으로 그 절차를 밟아나가면서도 묵언수행 하듯 일에 집중했다. 친했던 주변 사람들을 반드시 일대일로 만났고, 퇴사 소식을 전하며 '조용한 퇴사' 신조어를 인용한 '조용한 MZ'컨셉으로 퇴사할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 나의 퇴사 사유와 조용한 MZ 컨셉을 인정해주었다. 계속되는 연휴를 핑계로 - 워킹데이가 짧네요 -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식사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도 좋았다. 출근 마지막 날, 츤데레 편의점 사장님과 작별 인사할 때가 가장 슬펐고(? 오잉, 의외로 약간의 눈물) 전날밤부터 긴장했건만 각 부서에 인사를 드리는 시간은 아쉬웠어도 괜찮았다.
오래 다닌 회사라, 첫 직장이라, 각 부서 사정을 속속 알고 있어서, 사람들과 친해서, 업무가 친숙해서, 클라이언트 내막을 잘 알고 있어서 ··· 열거하자면 남아 있을 이유는 많았다. 그에 비해 벗어나야 할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변화가 필요하다".
내면에서 나오는 말은 한 마디였을지언정 점점 커지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을 계속 구체화하고 실천에 옮기고 현실로 끄집어내기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즉흥적이지 않다는 걸 내 자신 스스로가 더 잘 알기에 퇴사하게 된 지금은 홀가분한 마음이 더 들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면 약 10분 남짓이 걸렸다. 나는 대체로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길을 선택했는데, 그 길이 햇볕 받을 일이 거의 없는 직장인으로서 잠시라도 뜨거운 해를 만날 수 있는, '양지'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출근하던 마지막 날, 불현듯 조금 짧은 길을 걷고 싶어졌다. 그 날 느꼈다. 내가 '음지'라고 생각하며 기피했던 길이 사실 크디 큰 아름드리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날에서야 내가 음지라고 생각하며 선택하지 않았던 길이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로 가득한 곳임을 알았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곳곳에서 햇볕이 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두려워졌다. 가끔은 아는 것이 꽤 많아진 30대 중반처럼 생각될 때도 있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더더더더X더더더더 많다는 걸. 가보지 않고, 해보지 않는다면 배운 지식으로는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내가 생각하는 - 더 나아가 어쩌면 철썩같이 믿고 있는 - 말들이 사실은 내 안에서만 옳고 다른 사람, 시각, 틀에 의해 언제나 바뀔 수 있다는 걸.
내가 맞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한 가지 변화가 어떠한 무수한 변화를 가져올 지 두렵고, 앞으로 새로운 곳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내 안의 옳다고 믿는 말들이 어떤 변화를 맞이할 지- 그 말들이 어떤 인내와 풍파와 인정을 거쳐 내 안에 남게 될 지 두렵다. 모르는 게 많다는 건 어찌보면 두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출근 마지막 날에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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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쩌겠어,,, 두렵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변화해야 한다. 새로운 곳에 가기 전 내게 주어진 일주일의 휴식이 오늘부로 시작되었다. 그 기간 동안 두려움에 맞서기 위한 회복탄력성을 길러야겠다. 말은 상당히 그럴싸하지만 아기랑도 신나게 놀며 그냥 아주 구체적으로 신나게 놀아야겠다는, ENFP스러운 발상으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