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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아 Jan 15. 2024

'다시'의 힘

유산 이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든 것들


  5일의 유산 휴가를 보내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처음에는 3일은 쉬고 2일은 재택근무하려 했으나, 이렇게 된 것 푹 쉬기로 했다. 쉬어야 했다. 유산한 몸보다 마음이 쉬기를 강력히 원했다. 




    첫 날은 푹 쉬었다. 유산하면 바닥에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안정을 취했다는 후기가 많았다. 첫 날인만큼 나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워서 드라마를 봤다. 유산위험성이 높아졌다는 진단을 받고 집에 돌아와 고려거란전쟁 2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드라마는 4화, 5화였다. 나는 슬픈데, 드라마는 유감스럽게도(?) 재밌었다. 무엇보다 나와 남편이 모두 좋아하는 사극이었다. 우리는 언제 같이 볼거냐, 내가 누워 있어 빨리 시작한 탓에 남편의 속도가 느렸기에 빨리 5화까지 따라와라, 흥화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내 소식을 듣고 남편은 아기 이야기보단 내가 힘들까봐 걱정이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따뜻한 남편도 아기를 잃었는데 슬플리가 없었을 것이다. 남편이 직접 본인 생일날 태명을 만들어줬을 정도로 우리는 아기에게 애정을 쏟았다. 사극 하나에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는 건 거짓말에 가깝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재미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나는 슬픔 뒤에 뭔가를 기대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음에 감사했다.


     두번째 날은 눈이 왔다. 떠나버린 아기의 태몽을 큰 눈송이라고 생각했기에 눈은 나에게 각별했다. 공교롭게도 이 날 내린 눈은 폭설이었다. 서울에 아주 오랜만에 날리는 큰 눈이었다. 아침에 내리는 눈을 보며 하늘이 주신 날임을, 이별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날임을 알 수 있었다. 

  하루를 푹 쉬었으니, 다시 움직일 차례였다. 선생님도 마침 걷기를 많이 하면 남은 출혈이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야. 수술 없이 이렇게 다시 시작을 맞이할 수 있으니. 긍정적인 마음으로 눈을 맞으며 걸었다. 모자에도, 장갑에도, 목도리에도 눈이 내렸다 녹기를 반복했다. 온연한 겨울이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뱃 속에 아기가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텐데. 슬퍼하며 걸었다가,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야하며 걷다가, 큰 눈에도 길이 곧잘 생기는 올림픽공원을 보며 놀라하다가, 그 중간중간 달리기를 하는 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렇게 오래 걸었다. 두 다리로 하는 건 뭐든 자신 있는 나에게, 어울리는 이별이었다. 이별이 처음부터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24.01.09. 폭설이 내려도 길이 생긴다는, 그 마음처럼


    세번째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바깥 활동을 했다. 남편이 추천해준 한의원에 가서 몸과 마음을 다지기로 했다.  한의원은 집에서 걸어서 약 2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걸음수를 늘리기에 딱 좋은 거리였다. 게다가 늘 생각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이, 한의원에서는 맥을 짚어 보시곤 몸의 피해를 '몸이 혼란스러워 하는 정도'로 표현하셨다. 엄마 탓이 아니라고 했다. 수정란이 잘못되었을 거라고. 양약과 한약 다른 두 분야에서의 진료가 일치했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래... 내가 잘못한 건 없어.

    게다가 문진표에 운동 여부를 묻는 질문이 있어 주기적으로 운동한다고 적고 진료실에 들어가 '달리기'라고 밝혔는데, 한의사 선생님이 작년에 춘천마라톤 10km에 출전했다며 대뜸 달리기력을 밝히시는 아닌가. 말을 듣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춘천마라톤 응원갔었다, 춘마 풀코스 뛰어봤다고 TMI를 남발했다. (허허) 선생님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아서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상황에서 내가 그 한의원을 좋아하지 않는 힘든 일이었다. 그 첫인상은 잘 맞아 3일 연속 방문할 때마다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 따뜻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한의원 가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남편과 데이트를 했다. 거의 3년만에 함께 영화를 보았다. 내가 하루만, 반차만 내달라고 매번 요청했는데 드디어 허락(?!)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영화는 (또) 사극이었고, 이순신 시리즈 중 하나인 노량이었다. 남편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함께 볼 수 있어 좋았고, 그런 시간을 누릴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했다. 노량이 좀 더 재미만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영화를 다 보고는 아들을 데리러 갔다. 눈이 그쳐있었지만, 놀기에는 충분했다. 그 날은 저녁 6시까지 눈을 뽀드득 밞으며 함께 놀았다.


3년만에 데이트. 그러나 이런 용두사미 영화가 있나...



    네번째 날은 버스를 탔다. 집 동네를 벗어나 즉흥적으로 다른 동네를 갔다. 다른 동네에 가기 전, 한의원에에서는 다른 원장님이 진료를 보셨는데, 나의 피로도가 높다는 결과에 직장 내 괴롭힘, 스트레스를 말씀드렸더니 정말 걱정어린 눈으로 

잘 해결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하셨다. 너무나 순수한 문장이었다. 맥을 짚으며 잡은 손은 참으로 내내 따뜻했다. 사람 손이 그렇게 따뜻했구나. 첫째 아들 손을 매일 잡으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사람의 온기. 나에게도 온기가 남아 있을까? 누군가 내 손을 잡으면, 그 사람도 내 손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

    말의 온기도, 사람 손의 온기도 충전하니 별안간 용기가 생겼다. 길거리에 나서자마자 오는 버스를 달려서 대뜸 탔다. 다행히 익숙한 버스였다. (그러고보면 참 다행이란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다) 동마를 뛰었던 잠실대교를 지나가며 그 때를 생각했다. 올해 3월에 잠실대교에서 응원하는 내 모습이 그러졌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들을 만나면 그리 반가운데, 그 익숙함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더 좋을 수밖에. 버스 타는 시간은 짧았지만, 나는 바깥으로, 나의 어두움과 슬픔을 뚫고 나의 바깥으로 갈 수 있는 힘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몰입의 힘. 11시반부터 5시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


    나를 돌아보는 글을 쓰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이었다. 낯설게 도착한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갔다. 자리는 넉넉했고 역시나 커피는 맛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초코라토를 마시며 글을 썼다. 나의 유산과 직장 내 괴롭힘, 스트레스를 따로 쓸까 했지만, 결부할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일어난 같은 일이었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을 써내려가자 시간은 오후 5시가 되어 있었다. 묘한 차분함이었고, 슬픈 해방감이었다. 글을 쓰고 그것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내 뱃 속에 아기가 없음을 세상 또한 알게 되었으니 슬프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첫째 날처럼 바닥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했다. 나는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나름대로 슬픔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만사 제쳐두고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마지막 날, 한의원에서 드디어 체질에 대한 결과를 받고 한약을 짓기로 결정했다. 아기를 잃은 직후 내 몸과 마음을 과신하지 말고 제대로 임신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마음 먹으니 어느새 시작점인 느낌이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뭐든 다시 하자. 잠시 손 놨던 운동도, 식단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 자신 돌보기도 다시 시작하자. 


다시 하자



    다시 하자.

    일상으로 쏙 들어와버린, 출근한 오늘. 점심시간을 조금 넘기면서 이렇게 나를 남기는 건 지금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일어서자.

    유산을 겪으며 가까운 친구들에게 위로를 많이 받았다. 

    친구가 보내준 메시지가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아무리 슬퍼도 육아의 시계는 흘러간다. 아들이 있어 참 좋았다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 꿈에서 아기를 봤다고 하면 나는 놀란 얼굴로 아기는 잘 있었냐, 묻곤 했다. 그 대답에 일희일비하는 나를 보며 한탄스럽다가도, 아들은 밥달라, 뭐해달라 응석을 부렸다. 슬픔과 우울이 오래 가지 못한 것도 네가 있어서겠지. 


그러니까, 

다시.

다시 나아가자.



덧붙이는 말 : 이달아는 수음체질입니다.

저에게 더이상 돼지고기를 권하지 마세요. 회도..(안돼..) 바나나도..(안돼..) 커피도..(진짜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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