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어떤 빈자리
문득 상상해본다. ‘PARTY’에서 윤아가 귀엽게 외치는 “Hey~ Turn it up”이나 효연의 앙증맞은 “It’s Party” 같은 추임새, 브리지의 화음이나 클라이맥스 애드립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어갔다면 여름 시즌송의 청량함이 좀 더 배가되지는 않았을까? 태연이 사랑스럽게 문을 여는 ‘Lion Heart’의 인트로나 멤버들이 서로 주고받는 후반부 파트에 그녀의 목소리가 있었다면 노래가 좀 더 블링블링 하지는 않았을까?
최애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태연 같은 감정선이나 티파니 같은 울림은 없어도, 차갑고 도도한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내추럴 본 스윗’ 보이스는 ‘Gee’나 ‘Oh!’에서 달콤한 시럽처럼 스며들었고, ‘The Boys’, ‘Mr. Mr’에서는 차가운 얼음처럼 뿌려져서 세련미와 도회적인 느낌을 내는 데 일조했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범용성을 가진 보컬은 아니기에 솔로 곡들을 듣다 보면 때론 물리는 감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특정 스타일의 곡(여름의 송가가 된 ‘냉면’, SPC 브랜드송 ‘Sweet Delight’ 등)이나 어울리는 파트너(‘1년 後’의 온유, ‘어쩜’의 김진표)를 만났을 때는 인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피치카토 파이브의 노미야 마키처럼 라운지 팝에 최적화된 목소리라 생각하기에, 솔로로 나온다면 허밍어반스테레오 같은 일렉트로닉 라운지 계열 뮤지션과 콜라보 해보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다. 버트 배커랙의 노래를 부르는 재즈 가수가 될 리는 없겠지.)
화음이나 애드립, 내레이션 등을 넣을 때 더욱 티가 났던 유니크한 음색과 교포 간지 영어 발음은 적어도 내게 ‘소녀시대 노래’를 구분하는 인장 중의 하나였다. 그렇기에 ‘PARTY’와 ‘Lion Heart’를 처음 들었을 때는, 여전히 시원하지만 연유가 빠져 단맛이 부족한 빙수를 먹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Lion Heart” 앨범은 그 어느 때보다도 멤버들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앨범이 되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 팀이 원래 가지고 있던 커다란 매력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콘셉트와 퍼포먼스에 가려져 있지만 소녀시대의 노래는 보컬 라인, 비보컬 라인 구분 없이 서로 다른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최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태연과 티파니라는 두 개의 축을 서현이 단단하게 감싸고 써니의 맑고 고운 목소리나 효연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노래에 따라 필요한 무드를 만들어낸다.
9년 차 그룹에게 성장이라는 말을 꺼내긴 민망하지만 기존 멤버들이 조금씩 더 힘을 낸 걸 부인할 수 없다. ‘Lion Heart’의 클라이맥스나 ‘You Think’의 고음 애드립에서 자신 있게 치고 나오는 서현은 태연과 티파니가 짊어져야 할 부담을 나눈다. ‘어떤 오후’나 ‘Talk Talk’에서 투명한 슬픔의 정서를 이끄는 건 써니와 윤아의 목소리고, 효연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Check’나 ‘Paradise’처럼 마이너 계열의 댄스곡과 좋은 궁합을 보인다. 군데군데 양념처럼 뿌려진 수영의 래핑도 무리 없이 녹아들어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Green Light’인데, 분량을 위해 기계적으로 파트를 분배한 것이 아니라 노래의 색깔에 맞춰 적재적소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배치하고 화음을 쌓아 올려 조화를 만들어낸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8인 체제의 새 앨범 공식활동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많은 이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그래도 아직은 소녀시대’라는 걸 멋지게 증명해냈다. 억지로 이어 붙이면 “‘니 생각’이 나긴 하겠지만 ‘사자의 심장’으로 ‘파티’를 즐길 거야” 정도가 되려나. 덕분에 필자도 걱정을 내려놓고 이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눈치챘겠지만 이 글에서 그녀의 이름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아무도 예상 못 한 형태로 그녀가 팀을 떠나면서 필자의 늦깎이 덕질 인생 출발점이자 희망과 용기의 송가였던 ‘다시 만난 세계’는 이제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노래가 됐다. 그리고 8년을 이어 온, ‘우정으로 뭉친 소녀들의 도전과 성장’이라는 서사 구조도 균열을 맞이하게 됐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기쁨이’가 신나게 뛰놀던 소녀들의 세계, 그리고 그들을 자랑스러워 했던 팬들의 세계는, 이제 아픔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슬픔이’가 이끄는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