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10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 행동을 통제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평생 한 번도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행동의 결과에 확신이 없으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의심 탓에 항상 마음이 괴롭고 안간힘을 써 확신을 찾으며 확신을 찾지 못하면 더 심한 의심에 사로잡혀 괴로워한다... 즉 자신이 관심을 갖는 대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은 삶을 사랑할 능력이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특히 겁내기 때문에 삶을 두려워한다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로하는 합리화의 세 번째 형태는 무력감의 억압이다... 이 경우 무력감은 과도한 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형태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은 남보다 더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모임이라면 목숨을 걸고, 하루 종일 남 걱정하느라 바쁜 것은 물론이고 카드 게임이나 하염없는 수다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가짜 활동성이다. 가짜 활동성과 진짜 활동성은 구분하기 매우 힘들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분주함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에까지 뻗어나가며, 정작 해결해야 할 과제의 근본 특성과는 관련이 없다... 실제 그의 분주함과 게으름은 같은 것이다. 즉 내면 활동성의 결핍이다... 나는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한번 해보면 당신이 얼마나 쉼 없는 행동의 강제와 분주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감정, 다시 말해 기쁨도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감정과 함께 자라난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존재와 내면 활동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때문이다... 온전히 살지 못하는 사람,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자아를 초월한 사람은 실제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태어나겠다는 마음가짐(이것은 모든 '안전'과 망상을 버리겠다는 마음가짐을 말한다)은 용기와 믿음을 요구한다. 안전을 버릴 용기, 타인과 다를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딜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