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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Sep 29. 2024

숨을 참는 순간

짧은 글 #5. 24.09.29

1. 소독약 냄새
내게 수영장은 후각적인 기억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수영장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 염소 냄새가 역한 냄새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어릴 적 수영장에서 보낸 시간이 좋은 경험으로 남았는지, 그 냄새를 맡으면 묘하게 기분이 좋다.                                                                                                    

수많은 아이들과 나란히 처음 패드를 잡고, 발을 쭉 뻗고, 물을 밀어내는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패드를 잡고 첨벙대는 것을 몇 번씩 반복, 얼굴을 물속에 넣고 움-파-움-파. 어느 날은 패드 없이 자유형을, 어느 날은 배영, 어느 날은 평영, 접영.. 참을성과 집중력이 영 부족했던 내가 그래도 꾸준히 했던 걸 보면 재밌었나 보다. 촉각적으로는 왠지 수영은 내게 항상 겨울의 기억이다. 수영을 끝내고 나오면 늘 춥고 배고팠다. 긴 시간 물속에서 물을 빨아들여 쭈글쭈글해진 손가락 끝의 미끌미끌한 느낌과, 에너지를 모두 소모해서 배고프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 미각적으로는 배스킨라빈스가 수영장의 기억의 지도에 그려져 있다. 백석동 수영장 건너편에 배스킨라빈스가 있었거든. 끝나고 자주 사먹었었나? 그때 내 최애는 러브미와 슈팅스타였다. 러브미는 사탕처럼 달았고, 슈팅스타는 혓바닥 위에서 톡톡 쏘는 느낌이 재밌었다.


2. 스태틱 압니어

소독약 냄새와 까끌까끌한 손 끝, 러브미와 슈팅스타, 수면 아래에서 숨을 참으면서 돌아온 기억들은 그렇게 후각적이기도, 촉각적이기도, 미각적이기도 했다. 숨을 참고 머리를 비우면서 감각이 선명해지는 느낌. 어릴 적 수영장을 갔을 때의 기억과 감각이 되살아났다. 프리다이빙에서 가장 처음 배우는 것은 숨을 참는 것이다. 이를 스태틱 압니어, 스태틱이라고 부르는데, 리를 물속에 넣고 가만히 숨을 참는 프리다이빙의 여러 종목 중 하나다. 처음 배우러 간 내게 선생님은 물속에서 오래 숨을 참기 위해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 4단계로 나눠 알려주셨다.


1단계 준비호흡 : 긴장을 완화하고 생각을 비워 숨 참기를 준비한다.  

2단계 최종호흡 : 폐에 최대한 많은 공기를 채우기 위해, 복식호흡으로 천천히 큰 숨을 들이쉰다.

3단계 무호흡 : 실제로 호흡을 멈추고 숨을 참는 단계. 몸의 긴장을 풀고 체내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라가 호흡 충동이 오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한다.

4단계 회복호흡: 무호흡 상태를 끝내고 3번 이상 크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여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맑은 산소로 폐를 채운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에서는 프리다이빙을 "압니어(Apnea)"라고도 한다. 이것은 그리스어인 "Apnoea"에서 유래되었으며, 문자 그대로 "숨을 쉬지 않고"를 의미한다. 사실상 프리다이빙은 당신이 물속에서 숨을 참으면서 시작된다. 이 간략한 정의가 바로 프리다이빙의 본질이다.

프리다이빙은 당신이 물속에서 숨을 참으면서 시작된다. 간단하게 보이는 그 동작에 프리다이빙의 본질이 숨어있다. 딥프리다이빙 세계기록의 도전이든지, 아니면 카메라를 들고 단지 몇 미터 아래를 내려가든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프리다이빙에 접근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저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한 고요 속에서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 AIDA 2 프리다이버 과정 매뉴얼


스태틱 압니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적, 정신적인 완전한 안정이다. 육체적으로는 불필요한 근육의 긴장을 푸는 것,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지금 현재 이곳에 일어나는 순간에 집중하고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생각이 많을수록 산소의 소비가 늘어난다. 스태틱 압니어를 연습하며, 물속에 머리를 넣고 수면의 물결에 부딪혀 부서지는 빛이 바닥에 흐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해서도, 나의 목표나 욕심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완전한 고요 속에서 순간에 집중한다. 마치 명상을 하듯 나의 숨과 심장박동에만 집중한다. 심박수가 내려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3. 호흡에 대한 충동

어떤 방식의 프리다이빙을 선택하든지 당신 자신에 대해 엄청나게 배우게 될 것임을 장담한다. 프리다이빙을 하면서 우리는 가장 깊이 박힌 한 가지 공포, 즉 익사의 두려움과 마주한다. AIDA 과정을 밟으면서 당신은 그런 두려움이 기우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다.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호흡충동(urge to breathe)'은 몸의 명령에 따라 우리에게 주입되었다. 우리는 즉시 복종하는 법을 배웠고 복종하지 않으면 다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프리다이빙을 통해 '호흡충동'은 타고난 것이 아니고, 단지 당신의 몸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정보일 뿐이라는 것을 배울 것이다. 당신은 이 정보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새롭고 안전한 방식으로 배우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과 반복연습이 필요하다. 당신은 평상시처럼 이내 숨을 쉬고 싶어 하는 시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3, 4분 동안이라도 의도적으로 숨을 더 참아본다. 여기서 프리다이빙 여행은 시작된다.

지금쯤 당신은 호흡을 참는 것이 육체보다는 정신적 도전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단지 당신의 마음이 숨을 쉬지 않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더 많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마음은 왜 지금 당장 숨 참기가 지속 불가능한지에 대한 갖은 이유와 변명거리를 떠올릴 것이다. 보통 긴장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거나, 한 번의 큰 호흡이 충분하지 않았거나, 오늘은 날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당장 숨 참기를 멈추기 위해 어떠한 이유라도 찾아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현재 상황에 대한 당신의 모든 생각이나 의견에도 불구하고 숨 참기를 해낼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라.

당신의 마음이 지금 당장 숨을 쉬어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는 사실은 매우 홍미로운 이런 질문을 안겨준다. 누가 주인인가? 당신의 마음? 아니면 당신? 이 원초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당신이 주인이다. 그리고 언제 숨 참기를 멈출지는 당신이 결정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속에 생각들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을 아무 관련 없는 구경꾼이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가길 기다려라. 그냥 당신과 아무 상관없이 하늘에 구름이 어떻게 생기고, 모양이 바뀌고,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듯이. 이것이 숨 참기 심리전이다.
- AIDA 2 프리다이버 과정 매뉴얼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 우리가 숨을 참다 보면 읍, 읍 하면서 호흡충동이 온다. 숨을 참다 보면 숨을 서둘러 내뱉고, 공기를 다시 들이쉬고 싶은 신체적 반응이다. 그런데 이런 호흡충동이 몸에 산소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호흡충동은 체내 이산화탄소 농도에 따라 조절되는 것이지, 산소 농도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호흡충동이 와서 숨을 지금 당장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도 사실은 몸 안에 내가 쓸 수 있는 산소는 한참은 더 남아있다. 호흡충동을 마주하면 평소의 우리는 지금 당장 숨을 쉬지 않으면 마치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이 성급히 포기해 버린다. 하지만 호흡충동은 단지 이산화탄소가 농도가 이만큼 올라왔다는 신체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그 정보를 해석하는데 우리가 익숙하지 않을 뿐. 그러니 내 마음이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나는 아직이라고, 나는 할 수 없다고 어떤 이유든 찾아내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루는 법을 연습하면 우리의 몸은 안전하게 물속에서 더 유영할 력이 있다.


나의 마음의 주인은 나. 언제 숨참기를 멈출지 결정하는 것도 나. 호흡에 대한 충동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욕심과 불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삶에 지금 필요한 기술들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프리다이빙을 배우며 더 큰 즐거움을 얻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생각을 비우고 순간에 집중하는 법. 잘하고 싶더라도 나를 위해 힘을 빼는 법. 내 삶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에 대한 압력평형, 발살바 호흡법. 물속에서도 여유로울 수 있는 마음의 이완.


물속에서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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