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정했던 작품들아~ 혹시 자니? 보고 싶다.
킬링타임 정도로 혹은 가벼운 휴식이나 여가로 책이나 영화를 본다면 그저 한 번으로도 충분히 알차고 좋다. 행여 작품이 별로였다고 해도 본연의 제 역할은 훌륭하게 완수한 일회용품 종이컵과 같은 것. 이미 사용한 종이컵에 물을 다시 따라 마신다 한들 안될 것은 없지만 이미 물기를 머금어 젖어버린 종이컵에 다시 무언가를 따라 마신다면 처음 집었던 그 종이컵의 매끈하고 빳빳한, 새것이 지닌 유쾌한 질감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한번 봤던 작품을 '이미 본 거라' 다시 찾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일회용 종이컵만 있는 것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세련되고 우아한 그러고도 튼튼하고 내 손에 착 감기기까지 하는 그런 나만의 컵도 있기 마련이다.
나도 책이나 영화를 볼 때 한 번으로 인연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다시 찾게 되는 작품들이 더러 생긴다.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를 보다가 알고리즘에 이끌린 것처럼 '요즘 작가님 다른 책 안 내셨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 때, 혹은 소싯적 작가가 되겠다며 깝치고 다녔던 탓에 내가 다독을 한다고 잘못 알려져 지인들이 작가나 책을 추천해 달라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내용은 새까맣게 잊어버렸음에도 제목과 작가 이름만 용케 기억해서는 마치 다 아는 척을 하며 추천하곤 했었다. 문제는 추천을 받았던 지인이 정말 좋은 작품이었다며 내게 작품의 감상을 나누고자 하면 퍽 난처해진다. 마치 초기의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처럼 그저 말없이 빙긋 웃어주고 일단의 상황을 회피한 후 나는 '오잉? 거기 그런 내용이 있었던가?' 싶어 다시 책을 펼치곤 했다. 때때론 넷플릭스 추천작을 리모컨으로 한 바퀴를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볼 만한 것들이 없을 때에도 더러 인상 깊게 봤었던 작품들을 다시 보곤 한다. 상대의 복부 공격을 예상해서 배에 힘을 주고 있는 상황에 뜻밖의 안면 타격 당하면 대미지가 더욱 크다. 소위 명작들은 거듭 보았을 때 익히 예상했던 묵직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닮은 묵직한 카타르시스에 더해 미처 예상치 못한 라이트 어퍼컷이 턱이 꽂힌 것과 같은 파괴적인 감동이 더해져 정서적 K.O. 를 선사한다. 경험해 본 자만 느낄 수 있는 오르가슴처럼 이것은 중독성이 강력한 지적 쾌락이다.
좋은 영화나 책을 거듭 본다는 것의 결과가 섹스와 닮았다면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도와 무척 닮았다. 다도에서 일반적으로 첫 찻물은 마시지 않고 버린다. 첫 찻물은 음용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발효나 건조과정에서 불순물이 묻어 있을지 모르는 찻잎을 씻는데(세차:洗茶) 있다. 그리고 찻잎의 상태에 따른 적당한 시간과 온도를 고려한 물에 찻잎을 적셔 최적의 맛과 향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는(윤차:润茶, 성차:醒茶)의 과정을 거친다. 사실 좋은 품질의 차는 어떻게 마셔도 향기롭고, 맛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것은 좋은 찻잎에 숨어 있는 1%의 맛과 향을 이끌어내 궁극의 그곳에 도달하고자 함이다. 절정의 향과 맛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진짜 명차를 알아볼 수 있다. 좋은 책과 영화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접하는 처음엔 가볍게 그저 1회 용품 종이컵을 사용할 때처럼 버려도 된다는 마음으로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자. 그러다 우리가 즐긴 작품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여진의 시그널을 감지했다면 그 작품이 선사하는 기분 좋은 여운이 가실 때쯤, 마치 다도를 하듯 조금은 진지한 마음으로 두 번째 찻물을 우려내 보자. 더 향기롭고 눅진한 작품의 맛을 느끼는 특권은 기꺼이 이러한 수고로움을 감내한 당신의 특별한 몫이리라.
좋은 작품을 거듭 보는 것에 대한 규칙이나 특별한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원하는 때 언제든지 다시 보면 될 일. 장편소설이라면 수년에서 더러는 수십 년, 영화라면 대개 수십 명의 연출진과 스텝들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막대한 노력과 시간을 갈아 넣는다. 이처럼 오랜 기간 공들여 직조된 작품은 단번에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전체적인 내용을 알아야만 비로소 이해되고 구체화되는 은유와 상징들 그리고 다양한 복선과 단서들은 검은 마스크를 끼고 변장을 한 채로 어두운 그늘에 교묘히 숨어 있다. 어떤 작품을 높은 집중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고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플롯의 전개를 따라가느라 작품이 진실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어떤 작품을 보았고 말하고, 안다고 말한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은 맹인들이 코끼리 만지는 것(맹인모상:盲人摸象)과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더 많이 알고 싶다면 바둑처럼 '복기'가 필수적이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작품을 '재주행' 하는 것에서 나아가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에 나의 자아를 이입해 본다던가 때로는 작품에 한발 물러서 마치 신이나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된 것처럼 전지적 시점으로 작품을 관전하는 것도 꽤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여러 번 거친 훈련된 사람은 낯선 작품을 보게 되더라도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작품에 대한 선별 능력도 길러져 이 작품이 다음에도 다시 볼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지, 이번 한 번으로 족할 수준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혹은 '빠른 손절'로 귀한 시간을 아낄 수도 있겠다.
더불어 거듭보기는 내러티브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작품의 전개를 높은 확률로 예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작품의 줄거리를 꽁무니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명탐정 코난이 된 기분으로 숨거진 단서와 복선의 조각들을 모아가며 결정적 순간을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흔히 반전을 잘 예측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알든, 알지 못하든 이러한 방식으로 작품을 접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성향의 사람은 본인의 예측이 맞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작품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등장인물과 내러티브의 일관성을 깨지 않고 독자와 관객들을 속이는 작가적의 능청스러운 역량은 마치 적진에 지뢰를 매설하는 것과 같다. 정확한 시점에 공격하고자 하는 목표를 타격하는 '반전'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누구나 쓸 수 없는 고급스러운 플롯 구성의 기법이다. 흔히 꿈이나 운 따위로 개연성이 결여된 채 당혹스럽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해피엔딩을 만들어 버린다거나 혹은 등장인물의 일관성을 무너뜨리며 반전의 기술을 사용하다 '결국엔 역시 용두사미'라는 오명을 받는 작품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그런 와중에 마치 특전사의 작전수행 같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반전' 스페셜리스트의 작품을 만나 스스로의 예측이 전복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즐거움이다.
앞서 좋은 작품을 거듭 보는 것에 대해 규칙이나 특별한 방법은 없다 했었지만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예로부터 권장되어 온 방법이 있다. 멋진 작품을 두 번 정도 마주한 후, 쿨하게 헤어진다. 그리고 아주 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 애정했던 그 작품과 재회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고 정서적으로 보다 성숙해졌을 때, 이 세상의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게 된다. 잘 보이지 않던 것이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하기도 하고, 잘 보였던 것 혹은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것인 양 아웃포커싱이 되기도 한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실상 모르는 것이 되기도 하고, 잘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답을 알고 있었던 것에 놀라는 특별한 지적 체험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인지될 수 있다. 인간의 정서적 성장은 동굴 천장에 고드름 같이 달려 있는 종유석 같아서 스스로의 성숙된 변화를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종유석은 석회동굴 천장에서 탄산칼슘 성분이 함유된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져 나노미터 단위로 침전물이 쌓이고 때론 떨어지는 물방울에 깎여 내려가기도 하면서 눈에 보지 않을 만큼 서서히 변화해 간다. 천장의 높이에 따라, 탄산칼슘의 농도에 따라, 동굴 내의 대류에 따라, 퇴적물이 집적되는 방향과 속도에 따른 무수한 가능성에 의해 종유석의 크기와 길이와 모양이 달라진다. 우리 또한 종유석처럼 사회 또는 나라라는 동굴 안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에 직면하며 제각기 형태를 띠며 세월을 맞고 성장해 나간다. 무한한 상황에서의 선택이 모인 결과로 우리가 부여받은 지위와 역할은 너무나 쉽게 우리의 시선을 굴절시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같은 사건과 동일한 인물을 시간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때로는 기분에 따라서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 결과 이런 사소한 시선의 차이와 굴절이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든 이격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조금 유행이 지난 밈이지만 '둘리'와 '고길동의 재평가가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시절 만화영화 「아기공룡 둘리」를 시청하던 아이들은 둘리가 비록 장난꾸러기이긴 하지만 엄마를 잃고 빙하 타고 내려온 귀여운 아기공룡이라 생각했고, 반면 고길동은 그런 둘리를 괴롭히는 나쁜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아이들이 20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난 둘리는 '순수악'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오히려 고길동이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거의 매일 같이 경제적 손실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기는 둘리 '악당'들을 내쫓지 않고 보듬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오랫동안 '악당'의 누명을 쓰고 있었던 '쌍문동의 보살' 고길동을 재평가하기에 이른다. 아기공룡 둘리라는 만화영화는 변함없이 그대로였지만 이 작품을 먼 훗날 다시 보며 느끼는 바는 이와 같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간이 성숙하다는 것은 그저 선하고 모든 걸 꿰뚫어 보는 탁월한 통찰이나 지혜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평범한 우리와는 결이 다른 예수나 부처, 공자, 맹자 같은 성인 또는 군자일 것이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가능한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며 우리의 불완전성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틀릴 수도 있고 또 언제든 등을 돌릴 수도 있다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좋은 작품은 작가가 그것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제각기 다양한 시선과 의미들을 품고 있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거듭 보는 것은 대체로 즐겁지만 때로는 번거롭고 가끔은 지난하기까지 하지만 오늘도 한 뼘 성숙해지려는 우리의 노력을 보다 맹렬하게 활성화시키는 촉매제가 되리라 믿는다.
이번주 주말쯤엔 우리가 사랑했던 작품들에게 '자니?' 하고 카톡을 한번 보내보자. 진지한 장문은 옳지 않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녀가 혹은 그가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재회를 준비해 보자.
*이미지 출처
1. 만화영화 아기공룡 둘리 이미지 - 출처미상
2. 책과 머그, 종유석 Unsplash의Ademir Alves
3. 다도 Unsplash의五玄土 ORIENTO
4. 고길동 - 출처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