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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타 Apr 14. 2023

[책리뷰#1]「퀴즈쇼」 - 김영하

-인생의 어떤 특별한 순간에는 비유가 현실이 된다.

   세상 무서운 것 없다는 청춘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청춘의 끝자락. 아직도 사는 것이 무섭고 좀 지칠 때가 있다. 인생을 논하긴 아직 젊은 삼십 대인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환갑이 되어서도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거. 늘 불확실한 상황에서 놓여 두려워하고, 번민하며 때로는 눈물도 흘리는 까닭은 내 속에는 스무 살에서 성장을 멈춘 어린 자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말하는 '청춘'이란 무한한 가능성과 찬란한 미래를 당장이라도 뚝 떼어줄 것 같지만 정작 청춘이라는 시절을 누리고 있는 당사자인 MZ 세대들은 역대 경험하지 못한 가장 치열한 세상에 놓여 고군분투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청춘을 거쳐 갔을 사회의 기성세대들도 삶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이들은 청춘을 향한 위로나 격려에 무척 박한 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 이제는 더 이상 위로를 느끼지 못할 만큼 우리나라 청춘들은 많이 아프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

기성세대들이 들려주는 조언이나 경험담이란 마치 빛 쬐인 필름 같다. 지나치게 미화되어 별로 참고할만한 것이 못 되는, 디지털로 변환시켜 사용할 수도 없는 죄송하지만 쓸모없는 것들이다. 앞서서 생의 길을 걸었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준다는 것이  확인할 방법도 없는 과장된 인생이라거나 우리 때는 더 했다며 '라떼는 말이야'라는 시전 하는 것이 고작이다. 청춘들은 거창한 것을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들썩이는 어깨를, 떨리는 손을 따뜻하게 매만져 주는 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김영하의 장편 소설 「퀴즈쇼」는 흔들리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0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1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 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 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300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위 세대와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 세대에는 저 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구판 193쪽) - 퀴즈쇼 본문 중에서 


저 작품을 쓸 당시, 마흔으로 들어선 중견작가인 김영하는 마치 본인이 이십 대인 것처럼 현재 세대들을 명쾌하게 변론하고 있다. 지금의 MZ 세대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배운 똑똑한 세대다. 요즘 세대들은 인터넷을 하느라 책은 잘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기성세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는다. 인터넷과 첨단 기술에 익숙해 무궁무진한 정보들을 탐색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도 겸비하고 있다. MZ 세대들에게 누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이기적이라고 폄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급속도로 상항평준화된 세상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 예선 - 20대의 세상 Unintended.

민수는 대학원을 졸업했고 막연하게나마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릴 땐 엄마로 그리고 조금 나이를 먹어서는 이모로 부르던 인숙의 죽음을 시작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영화배우 출신답게 동년배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에 당당하고 세련된 품격까지 느껴지는 인숙. 희미한 예고나 복선도 없이 그 강녕해 보이던 인숙의 죽음은 민수에게도 독자에게도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죽음은 원래 그런 것이다. 다만, 그런 죽음의 속성이 민수의 입장에서 인숙의 죽음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근거는 되겠으나 인숙의 죽음을 ‘수용’하게끔 할 수는 없었다. 민수는 냉정하고 건조한 톤으로 인숙과 관련한 추억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두 번씩이나 꿈속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과 장례가 끝난 후 불면증으로 ‘영퀴방‘에 중독되어 심리적인 충격을 해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긴 시간의 여유를 줄 만큼 관대하지는 않다. 수도와 전기가 끊길 것이라는 압박을 받고,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집이 넘어가게 되었다. 자칫하면 도리어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될지도 몰랐다. 시류의 방향대로 세상 속에 몸을 누이고 있던 민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물살을 맞서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결국 민수는 창도 없는 한 평 반짜리 고시원에서 기거하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으로 내몰린다. 인숙의 보호 아래 시류의 방향대로 세상 속에 몸을 누이고 있던 민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대한 사회의 물살을 스스로 맞서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그러한 삶 속에서도 세상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로맨티시스트 민수. 그가 여자친구인 빛나에게 굴욕적 경멸을 받고 다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들었던 뮤즈의 "Unintended". ‘예기치 않음’ 혹은 불확실성으로 풀이되는 이 단어가 청춘의 삶에 내재한 본질이다.




■ 본선1 - 문제적인 개인 그리고 문제적인 세상

퀴즈쇼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내 앞에 어떤 퀴즈가 도달할 것인가 알 수 없는 임의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운의 영향력이 그렇다. 정답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쟁자들을 제치고 빠르게 대답할 수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점도 닮았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의 여유가 없다. 다만 그렇게 수많은 질문들을 ‘견디며’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에게는 대가가 주어진다는 가능성 정도가 명확할 뿐 본인이 퀴즈쇼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역시 불명확하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퀴즈쇼에 참여하는 것이다.


촉박한 시간에 쫓기며 어쩔 수 없이 확신할 수 없는 답을 그저 말하는 것. 굳은 얼굴로 질문을 강요하는 세상은 한참을 뜸 들이며 누가 정답을 맞혔는지 틀렸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때문에 모두가 긴장하는 ‘링’ 위에 우리들은 서 있다.

 

이민수는 소설 플롯의 전개상 가장 중요하고 당연하게 필수적인 인물이지만 이른바 ‘문제적인 인물’은 아니다. 문제적 주인공에게 세상은 어느 정도 그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운행되어야 마땅하겠지만, <퀴즈쇼>에서 세상은 이미 주인공이 어떻게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추상적이며 막연하다. 말하자면, 세상은 가련한 젊은 주인공 없이도 잘 돌아간다. 오히려 문제적인 것은 지금까지 보아왔듯, 세상이다.

(453쪽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평론 중에서) 


소설에서 민수는 세상에 대항하지 못한다. 때문에 사회의 전복이나 변화를 추구하려는 시도도 없다. 어떠한 사건에 직면할 때마다 낙관주의로 위장하며 그 굴복을 포장하려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문제적인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소설에서든 현실에서든 세상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어떻게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추상적이며 막연한 존재다. 그러나 민수가 혹은 우리가 세상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해서 혹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잘’ 돌아가는 것이라고 해서 루카치가 말한 ‘문제적임’이 세상으로 해석된다면 소설이 너무 불편해진다. 마치 '불편한 골짜기'처럼 말이다. 작가의 글에서 ‘청춘의 찬란한 빛’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썼다면 어떻게 손써볼 수 없는 거대한 세상을 균열시킬 주체를 실종시킬 리가 없다고 생각해 본다. 


■ 본선2 - 질문의 권력

퀴즈쇼에서 진행자와 참여자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단순히 진행자의 숙련되고 풍부한 경험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민수가 참여했던 ‘회사’에서 고도로 훈련받은 참여자들은 진행자에 못지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몸의 신경세포가 곤두설 만큼 긴장해 있다. 진행자는 질문을 하는 입장이고, 참여자는 질문을 받는 입장이다. 즉, 질문을 할 권리와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의무 사이에서 권력이 발생한다.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질문할 권리가 없다면 그것이 상대에 대한 권력으로 작용되기가 어렵다. 정답을 아는 것과는 무관하게 질문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상대에게 권력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답하기를 강권하는 권력으로 군림한다. 

“세상이 그런 젊은이를 좋아하니까. 세상은 질문하는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원하지.” (47쪽 퀴즈쇼 본문 중에서) 


진행자가 문제를 냈을 때 참여자가 반대로 질문을 하게 되면 퀴즈쇼가 진행될 수 없다. 틀린 답이든 옳은 답이든 언제나 무언가 대답해야만 한다. 그것이 퀴즈쇼가 혹은 사회가 참여자들에게 원하는 방식이며 규칙이다. 이 규칙이 어긋나는 순간 퀴즈쇼는 성립될 수가 없다. 작품 내내 민수는 유독 질문으로 말이 많다. 나는 이 점에서 그가 루카치가 말한 '문제적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 본선3 - 나는 나를 질문할 권리가 있다.

보다 노골적으로 민수는 ‘나는 여전히 질문이야말로 나 같은 젊은이가 세상을 배워가는 중요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질문은 ‘문제적 개인’인 민수가 거대한 세상에 대항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소설 <퀴즈쇼>의 시작은 공교롭게도 민수 자신에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다른 애들 옆에 서 있는 저 젊은 여자들은 도대체 누구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문은 권력관계가 성립할 수가 없다. 하지만 민수는 이 물음에 자문자답하면서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의심 혹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민수는 외할머니인 인숙이 엄마인 줄로 알고 살았던 세상을 전복시킬 수 있었다. 자신에게 하는 질문과 스스로 찾아낸 대답은 민수의 작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상에게 하는 질문과 또 그 질문을 스스로 찾아내면서 세상과 대응한 권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맞설 수 있는 힘을 보유하는 것이 현실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결선 - 이십 대들에게 주는 경고와 선물

삶의 막연하고 깊은 불안함을 해소하며 자신의 생명으로서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것이 섹스다. 섹스를 이십대적인 것이라고 갖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그 육체적임으로 동의해 주었으면 좋겠다. 민수는 전문적인 훈련과 교육을 받으며 퀴즈를 풀게 되는 소위 ‘회사’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갔다. 비교적 좋은 승률을 거두며 꽤 두둑한 수당을 챙기며 인정을 받던 그가 메두사와 섹스를 한 이후부터 모든 상황이 반전된다. 지갑이 없어지고, 단말기는 먹통에 팀원은 쌀쌀맞기 그지없고 심지어 유리는 회칼을 들고 민수를 죽이려고 한다. 


나는 죽음이므로 나의 얼굴을 봄은 곧 그 존재의 죽음을 뜻하며,
돌로 변함은 무덤의 비석을 의미한다. 누구도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므로.

한 때는 지혜롭고 아름답기까지 했던 여인, 메두사가 했던 말이다. 메두사의 얼굴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돌로 변하게 된다. 스스로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고 칭했던 메두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젊음이 미래의 얼굴을 보고 그것에 안주하고 있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민수가 회사를 도망쳐 나오는 과정은 다소 모호하고 환상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 팔뚝에 선명하게 긁힌 상처를 남긴 것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럴 다할 자세한 설명도 없이 석 달 동안이나 사라졌던 민수를 찾기 위해 직장을 던져버리고 전화를 받고선 조금도 지체 없이 달려온 지원. 작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고 앞으로의 이십 대들에게 요정의 키스처럼 달콤한 낭만을 선물하며 속삭이고 있다. “잘될 거야, 다 잘될 거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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