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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타 Apr 15. 2023

너에게, 아니 실은 나에게 쓰는 글

평소에 신실하지 못한 기독교 신자가 다급할 때만 신을 찾듯, 나는 큰 고민이 생길 때마다 글을 쓴다. 그저 멍하니 모니터의 하얀 화면을 바라보면 머릿 속도 마법처럼 무결한 백지상태로 변한다. 망망한 그 하얀 바다 위에 부유하는 생각들을 하나씩 건져 올려 단어로 그리고 문장으로 하나씩 그물처럼 엮으면 어지러운 생각들은 가라앉고 마음이 잔잔해진다. 생이라는 거대한 바다는 선택과 고민의 연속이다.  '뭐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을 때 마치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한 높은 파도와 혹독한 폭풍우에 직면하게 된다.

덕분에 글쓰기는 나의 오랜 습관이 되었다.





너는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 회사 근처에서 밥을 먹자고 했었다. 그때 너는 웃으면 말했지만 일주일의 침묵은 나로 하여금 나쁜 상황들로만 가득 찬 책 한 권을 쓰게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글머리에 세우고 혹시 모를 최선의 시나리오는 보이지 않게 반으로 접어 맨 뒷자리로 밀어둔 채, 너를 기다렸다.  


  "오빠, 죄송해요. 그날 밤은 제가 좀 취했었나 봐요. 실수였어요. 그때 일은 없었던 걸로 해요."


행여 이런 말이 나오더라도 태연히 웃을 수 있도록 거듭 연습했다. 그때 우리는 기분이 좋았고 또 술을 마셨고 그래서 더 기분이 좋았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한 번은 우연, 두 번은 우연의 반복, 세 번은 필연'이라는 말을 신뢰한다. 이상하게도 너에게는 이 말이 적용되지 않았다. 나의 확증편향을 의심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알 수 없었다. 성격이 급한 나는 무엇이 되었든 너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우리는 대체 어떤 사인가.


너와 마주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음식들, 약간 낮은 톤의 편안한 목소리,  관심 있는 분야의 대화에서 유리처럼 반짝이는 너의 총명한 눈빛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봄의 다소 이른 해는 시나브로 져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몽환적인 하늘은 보기에 좋았고 기분을 설레게 한다. 나는 이렇게 해가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넘어가 붉은 기운을 대부분 잃은 이런 하늘을 무척 좋아했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이내 밤이 되어버리는 그 짧은 시간, 보랏빛 하늘은 찰나여서 더 매혹적이다. 마치 너처럼.

그때 지하철 역 앞에서 엷게 미소 지은 채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너를 발견했다. 정돈되고 또렷한 걸음이었지만 어딘가 안색이 피로해 보였다. 맛있는 밥보단 푹신한 침대에 뉘어 주고 싶을 만큼. 밥만 먹고 너를 얼른 집에 데려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이제 곧 다른 곳으로 떠나요."


나의 계획과 준비는 카페에서 네게 들은 이 한마디에 무용해졌다. 이런 대사는 내 시나리오에 없었다. 인생의 무한한 경우의 수 앞에서 계획이란 이렇게 늘 덧없다. 너는 내게 처음으로 가족 이야기를 했고, 너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더 수척해 보였던 걸까. 벅찬 회사 업무를 힘겹게 끝내고 피로와 불면 그리고 스트레스를 견뎌가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날개가 타는 줄도 모르고 빛을 향해 전진하는 나방처럼 안쓰러워 보였다. 너는 어느 상황이든, 어떤 조건에서든 최선을 다할 것이므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건 좋지만 그래도 너를 그렇게 헐어 쓰지는 마."

했던들 아마 소용없었겠지만 이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날 나의 첫 번째 후회다.





너는 사양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너를 집까지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너와 함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참 행복한 일이다. 너의 말 한마디는 흥미로운 상상의 단서가 되었고, 너를 조금 더 알아가는 중요한 퍼즐이 되었다. 걷기는 제법 먼 거리였는데 우리는 금세 너의 집 입구에 닿았다. 작별인사를 하는 동안 내 눈이 읽혔던 모양이다.


  "그렇게 너무 아련한 눈빛 하지 마세요. 우리 또 보면 되잖아요."


너는 아마 약속을 지킬 것이다. 다만 그 '또'가 언제인지는 불확실하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고맙지만 야속하기도 한 그 말에 나는 손을 흔들었을 뿐,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날은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너의 뒷모습을 보기 힘들어 일찍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그날 나의 두 번째 후회다.

 

너와 함께 걸었던 길을 거슬러 돌아갔다. 혼자 걷기에는 역시 퍽 긴 거리였다. 그래서 버스를 탔다. 약간 멍한 상태로, 내게 새롭게 주어진 데이터들을 입력하고, 조합해서 새로운 서사를 써보려 했었다. 그러나 하얀 백지 위에 커서 하나만 깜박, 깜박 의미 없이 깜박일 뿐이었다. 교통체증이 없는 늦은 밤, 제법 속도를 내며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나만 홀로 멈추어 있었다. 그러한 속도의 이격 때문이었을까, 결국 나는 내려야 할 곳을 한참 지나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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