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일찍이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는 그의 책 "제2의 성"(1949)에서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된다."(On ne nait pas femme, on le devient)라고 말했다. 철저히 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현재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관점이다. 사회에서 그 어떤 것도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보기 힘든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자답다'와 '남자답다' 역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우리 모두 인간으로 태어나 나름의 성기를 갖고 있지만 그것만이 여성성/남성성으로 인간을 구속하지는 않는다. 바로 사회 속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운 그 모든 것이 한 인간을 사회 관념에 맞는 인간으로 만든다. 여성성과 남성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키워지고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것'은 여성성에 가깝게 여겨진다. 그러므로 화장을 하는 남성이나 화려하게 꾸민 남성은 남자다운 남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화장'이라는 개념에 여성성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 어떤 개념에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가치 판단이 들어간 의견을 우리는 자라면서 수없이 많이 듣는다. 핑크는 여자 색이야, 치마는 여자가 입는 옷이야, 남자는 덩치가 커야지, 남자면 운동을 잘 해야지, 너는 여자인데 왜 꾸미 지를 않니, 너는 남자인데 왜 겁이 많니 등등 우리는 여자나 남자로 태어난 게 아니라 자라면서 여자/남자가 된다.
나는 이런 접근법을 페미니스트에게 적용하려고 한다.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특별한 조건은 없다. 그저 양성평등에 동의한다면 그 누구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여자여서 페미니스트이고 남자여서 페미니스트가 아닌 건 아니다. 사람은 평등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두 다 페미니스트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페미니스트로 태어나지 않는다. 자라면서 사회의 다양한 부조리를 보고 문제의식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더 깊이 생각할 때, 더 평등한 세상을 지향할 때, 페미니스트가 된다. 나 역시 의식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시작은 나의 진로를 생각할 때였다. 한국에서 23년을 살아온 대학생일 무렵, 막연하게 나는 결혼하고 싶었고 아이도 낳고 싶었고 그와 동시에 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보니,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결혼, 아이, 일이 세 가지를 동시에 병행하는 게 힘들다는 사실이 아주 많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이게 내가 성차별에 눈뜨게 된 확실한 계기이다. 물론, 현재 한국은 여자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사회인으로 살기 매우 힘들다. 그렇지만, 아이와 일을 꿈꾸는 남자와 여자는 사회에서 다르게 다뤄진다. 남자에게는 당연하고도 축하하는 일이 아이다. 여자는 임신을 하면 출산/육아휴직, 경력단절 등 많은 문제를 앞둔다. 나는 더 많은 남자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성평등은 남자에게만 많은 부담을 지우는 가부장제에서 해방되는 데에 한몫을 한다. 결혼을 한 커플은 남자, 여자 모두 한몫을 하는 개인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책임감 있게 살 수 있으며 어느 한쪽의 성별에만 불균형하게 기울어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양성평등을 추구한다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페미니스트(양성 평등주의자)이기 이전에 차별에 반대한다. 이 세상에 부조리한 차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는 반 차별주의자가 되었다. 지금도 내 안에 싹트는 차별적 생각을 걷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나는 차별이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자에 대해서도 그들도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동성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나자 그들의 아픔과 차별이 너무나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성애에 대해 몰랐을 때에는 인식조차도 없었고 그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오해와 편견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상황에 더 집중하자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고 자란 여성인 나는 내 안에 주입된 가부장적인 사고를 발견할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쳤다. 과거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내벹었던 말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부끄러웠다. 내가 인식도 하지 못했던 불편함이 다 성차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버지가 가장이어서 막대한 책임을 지고 우리 가족을 건사한 것을 제대로 인식한 순간, 내 앞에서 대놓고 남자들이 내 의견을 무시했던 순간들..... 다시는 내 입으로 차별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보이는 차별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나와 가족을 통해서 가부장제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뼈 저리게 느낀다. 특히나, 나는 경상도 사람인 데다가, 가장인 아버지가 혼자 경제 활동을 책임지는 가정의 장녀이다. 한평생 바쳐서 가장 역할을 한 아버지와 전업주부로서 독박 육아와 가사노동을 담당한 어머니의 딸인 것이다. 부모님 두 분을 보면서도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많았다. 두 분 다 같은 학력을 가졌지만(같은 대학이심) 30년 뒤의 상황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종종 부모님이 싸울 때 가장인 아버지가 전업주부인 어머니가 놀아서 편하겠다는 푸념을 토로하는 경우가 나이가 들수록 많아졌다. 그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경제활동을 활발히 해야지라고 다짐했다. 부모님 두 분이 최대한 나와 남동생을 차별 없이 키우셨지만, 한국 사회에 성차별이 존재하기에 나와 동생은 각자의 세상에서 성차별을 알며 자라났다. 대학교 졸업반에 가까워지자 남동생은 남자로서 사회에 진출하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군대를 다녀오고 자신이 이뤄놓은 게 없다고 한탄하면서 우리 집의 장남이라는 무게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나서 가족 각각이 지닌 부담과 책임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부과된 짐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아직 내가 부족해서 아버지의 짐은 덜어낼 수 없었지만, 언젠가 아버지도 나에게 의지하는 날이 오기를 빈다. 나는 아버지를 경상도 남자에 장남으로 만든 이 사회에 반감을 가진다. 경상도 남자, 장남에 자존심까지 세서 아버지는 자신이 힘든 것을 도무지 가족과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게 아버지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경상도 남자에 장남이기도 한 아버지가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날에 나는 축배를 아버지와 함께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