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스페인의 전성기
이번 테마에서는 프라도 미술관의 그림을 통한 스페인의 전성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492년 이사벨 여왕은 알람브라를 함락하고 스페인을 가톨릭으로 통일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콜럼버스를 지원해서 세계사를 바꿔놓는다. 신대륙 발견이라는 큰 사건으로 스페인은 대항해 시대의 시작을 알리며 유럽에서 입지를 굳건히 한다.
역사적 대업을 달성한 여왕의 죽음을 그린 에두아르도의 작품이다. 그녀의 유언에 따르면 자신의 유해를 '그라나다'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그라나다의 알람브라를 함락하고 스페인을 통일했으니 이사벨 여왕에게 그라나다는 특별했다. 붉은 옷을 입은 남편 페르난도 왕은 당시 아라곤의 통치자였는데 지금의 카탈루냐의 옛 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두운 옷을 입고 슬퍼하는 딸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황녀이기도 한 '후아나'다. 그녀가 정신질환을 앓아서 역사적인 별명은 '광녀 후아나'로 불린다. 합스부르크 왕가 남편 펠리페 1세의 외도로 많은 갈등을 겪고 결국 정신질환을 앓았던 이사벨의 딸이다. 이 이야기도 긴 스토리가 있으니 다음 기회에 하겠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카스티야의 왕가의 후아나와 합스부르크 왕가 펠리페 1세의 결혼으로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과거의 오스트리아)은 유럽에서 막강한 입김을 행사하는 동맹관계를 이루게 된다.
'광녀 후아나'의 아들 즉 이사벨 여왕의 손자가 Carlos 5세였다. 이 남자는 역사상 가장 큰 천운을 타고난 왕족이기도 하다.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스페인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 친가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식민지 (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의 상당한 영토 등)를 모투 통치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면서 동시에 스페인의 왕, 이탈리아의 국왕이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가 유럽 역사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 가톨릭 이외에는 모든 종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며 그 교리를 위배한 국가와의 전쟁을 많이 치렀다. 당시 유럽은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지역마다 신교와 구교의 종교적 분쟁이 많았을 때였다. 남미 땅에서 약탈한 많은 양의 은과 금은 스페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런 막대한 국가의 재산이 수많은 종교 전쟁으로 낭비가 됐다. 그런데 그런 전쟁들은 스페인의 국익과 관련이 없었다. 또한 너무 많은 전투에 직접 나서다 보니 스페인의 경제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는 스페인 말도 제대로 구사를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국가는 막강했으나 당시 스페인 경제는 상황이 엉망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가가 잘 사는 것과 국민이 잘 사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당시 스페인이 그랬다. 재정 관리를 얼마나 부실하게 했으면 국가 파산 선고도 여러 차례 있었다.(지금의 IMF) 동물의 왕국에서 겉으로는 화려하고 용맹한 호랑이가 당시 스페인의 위상이라면 소굴로 들어가니 실제로는 호랑이의 새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겉모습과 다르게 스페인은 속으로 점점 병들어가고 있었다.
Carlos 5세를 그린 티치아노의 작품이다. 말을 타며 전쟁을 직접 지휘한 왕의 용맹함을 표현했다. 색채를 중요시 여겼던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티치아노 특유의 강렬한 붉은색이 특징이다. 돌출된 턱은 그가 합스부르크의 혈통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종교정책으로 인한 문화적 폐쇄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스페인의 발전을 저해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 이념을 중세의 유럽처럼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술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수의 미술 애호가들이 16세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름 있는 스페인 화가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el greco 역시 스페인 화가는 엄연히 아니다.) 당시 미술의 중심은 당연히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본고장 이탈리아였는데 자신의 초상화는 예술의 변방 스페인이 아닌 최신 트렌드에 가장 앞서는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맡겼다. 그 대표 화가가 당대 최고의 초상화 화가 티치아노였다. 이 무렵부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그들이 통치하는 지역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프라도 0층에 위치한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은 대다수가 스페인이 아닌 외국 화가들 그림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선조들이 잘 차려 놓은 밥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Carlos 5세였다. 동생에게 미안했는지 신성 로마 제국만 그의 형제에게 물려주고 그 외의 땅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아들 펠리페 2세 역시 조상들의 땅을 그대로 물려받는 행운을 누린다. 그리고 국가의 부채도 같이 물려받는다.
티치아노가 그린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서였을까 그의 초상화 배경의 대부분은 실내다. 아버지처럼 용맹하지도 않았으며 성격도 우유부단했다고 전해진다. el escorial이라는 시골의 수도원 같은 별궁을 지어 대부분의 일을 궁전 방구석에서만 했다고 전해진다. 즉 모든 일을 서류로만 처리해서 별명이 '서류 왕'으로 불린다. 지금의 스페인의 비합리적인 관료제의 기원은 '서류 왕 펠리페 2세'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그는 전쟁도 서류로 승인했고 직접 참전한 적이 없었다. 결혼도 서류상으로만 하기도 했는데 두 번째 부인이면서 친척이었던 영국의 여왕 메리 1세였다. 혼인을 했음에도 각자 바다 건너 떨어져 자신의 왕국을 통치했으니 정상적인 부부 관계는 아니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매리 여왕은 몸에서 강한 악취가 난 것으로 전해진다. 남편은 그 냄새를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펠리페 2세 역시 역시 입에서 나오는 악취로 여름에 파리가 들어갈 정도였으니 아내에게 불만을 가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아내가 암으로 일찍 요절하고 새로운 신붓감을 물색해야 했다.
이탈리아 소포니스바가 그린 펠리페 2세의 초상이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묵주를 통해 그의 가톨릭 수호에 대한 굳건한 정신이 보인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가톨릭 이외에는 용납을 하지 않은 폐쇄적인 정책을 고수했다. 잔혹했던 스페인의 이단 재판이 전국을 공포로 몰아 놓았을 때였다. 가톨릭 교리 이외에는 이단으로 보는 강한 보수주의자였지만 그림 수집품들을 보면 의외다. 어느 왕들보다도 그가 수집한 그림들 중엔 누드화가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프라도 미술관의 16세기의 누드화들 대다수가 페리페 2세 때 수집한 그림이다. 겉으로 억눌러진 성적 욕망을 예술품으로라도 충족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정치적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도 않았고, 아버지처럼 국가 파산 선고도 몇 차례 겪었다. 이와는 별개로 유럽에서 보는 당시 스페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던 시대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 the invencible alrmada)로 불리는 스페인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그들의 잘 나갔던 시대는 의외로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로 무적함대라는 말은 스페인 입장에게 듣기 좋지만은 않은 역사적 사연이 있다.
부인 매리 1세(별명 블러디 매리)에게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배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였다. 그런데 펠리페 2세는 아내가 죽자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게 된다. 스페인이 영국에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시도 임을 엘리자베스는 간파하게 된다. 그리고는 정중히 거절을 하기 위한 명언을 남긴다.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최강 스페인 국왕의 청혼을 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게다가 영국은 그들만의 가톨릭 '영국 성공회'를 만들었으니 가톨릭을 수호하는 펠리페 2세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다. 이에 가톨릭을 수호하는 스페인이 보기 좋게 영국을 응징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끌어내리려는 역사적인 전투 칼레 해전(1588년)이 벌어졌다. 스페인 병력 2만 8천 명과 영국 병력 1만 5천 명 그리고 스페인 전함 127척과 영국 전함 80척에 불과한 상대도 안 되는 전투였다. 보기 좋게 스페인의 승리가 예상됐다. 그런데 스페인은 압도적인 병력과 군사력에 방심을 한다. 스페인에 매우 불리한 바람이 불었음에도 전쟁을 강행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래서 이 바람을 '프로스탄테 풍'이라고 부른다. 영국 입장에서는 신이 영국 신교의 편에 섰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게다가 해전을 이끄는 명장 알바로 제독이 전쟁을 앞두고 사망하는 사건은 전쟁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의 해군은 병력과 군사력이 앞섰지만 오합지졸이었다. 특히 전투로 침몰한 전함은 10척도 되지 않고 풍랑을 잘못 만나 100여 척이 스스로 침몰을 하게 된다. 영국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절로 승리를 거두었으니 황당한 일이었다. '무적함대'는 말도 당시 영국이 지어준 조롱의 별명이었다. 싸우려고 하니 적이 없다는 뜻이다. 무적함대를 최초로 침몰시켰다는 것으로 영국의 승리에 큰 의미를 두려는 말이기도 하다. 무적함대의 침몰 이후 스페인 역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도 이제 저물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순전히 운이었듯이 이 역사적인 전쟁도 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직도 세계의 패권을 가졌던 16세기 무적함대 시절 누렸던 옛 영광을 잊지 못한다.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이 만든 신이 내린 기회를 너무 빠른 시간에 놓쳐버렸다. 만약 전성기 스페인이 종교적 폐쇄성을 버리고, 무리하게 국고를 낭비하는 많은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세계 표준어는 스페인어가 됐을지도 모른다. 세계사는 비슷하게 흘러간다. 문명의 역사는 공통적으로 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으로 발전을 했고, 그로 인해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로마, 이슬람, 서고트족이 그랬다. 그리고 초기 가톨릭도 그러했다. 하지만 문화, 종교, 정치적으로 관대함을 잃고 폐쇄적으로 갈 때 그 문명은 몰락을 했다. 스페인은 지배를 받았을 때 로마, 이슬람이 전해준 문화적 다양성으로 발전을 했다. 지배자들은 종교, 문화적으로 관대했고 그렇게 스페인은 다채로운 문화적 유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종교적 관대함과 문화적 다양성을 과거 지배자 문명에게 배웠지만 그들이 지배자가 됐을 때 그들은 조상들의 전해준 교훈을 망각했다. 신대륙 발견 이후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겐 재앙의 역사 시작이었다. 그들은 문화적 관대함과 다양성이 아닌 폐쇄성으로 원주민을 인간이 아닌 동물로 보며 학살하며 문명을 파괴했다. 금과 은을 빼앗는 대신 기독교와 세균 그리고 스페인어를 전파를 해주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몰락하면 패권을 다른 유럽에 넘겨주게 된다.
스페인의 무적함대 시절 짧은 전성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다. 그렇지만 한 번이라도 세계사의 주인공 역할을 해봤던 자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조금은 부러운 대목이다. 승자의 여유일까? 그들은 여유롭고 웃음이 많다. 어느 나라보다도 친절하고, 관대하며 큰 욕심이 없다. 이런 인간미는 스페인 사람들의 매력이다. 이것이 이들의 본모습일 수도 있다. 어차피 역사적으로 권력을 잡았던 이들은 극히 소수의 특권층이었으니 말이다. 대다수의 스페인 민족의 정체성은 이들의 이념과 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해맑게 웃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글:아트 카운슬러 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