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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SICO iAn Feb 23. 2019

‌엘그레코 그리고 톨레도의 매너리즘

‌단절과 고립이 만든 크리에이티브

성공하기 힘들었던 르네상스시대의 엘크레코, 그리고 오늘날의 미대생들

프라도 미술관과 톨레도에 가면 기괴한 화풍의 화가 ‘엘그레코’의 그림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고전주의적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표현한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이나 극적인 역동성과 화사한 컬러를 구사한 바로크 화가 ‘루벤스’ 역시도 엘그레코와 함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실 이들에 비하면 엘그레코의 그림은 대중에게 친숙한 화풍이 아니다.

고전주의가 표방하는 절제의 미학과 달리 다양한 컬러를 구사했으나 그것은 바로크와 로코코에서 드러나는 화사함이나 편안함을 주는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혹자는 기괴한 뉘앙스가 강한 엘그레코 그림의 색채를 두고 수채화의 그리기 과정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는데 일주일동안 물통을 바꾸지 않아 ‘똥 색깔로 변해버린 물 색깔 같다’고 언급하기까지 한다.
엘그레코의 그림은 형편없는 소묘력, 우울한 색채, 어설픈 공간표현, 자연스럽지 않은 손동작과 포즈로 요약되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당대의 미적 기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이러한 화풍은 주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개선사항을 아무리 강조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류의 미대 입시 준비 학생들의 그림 분위기와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엘그레코 그림은 현재 한국의 대학 입시 미술 시험을 낙방하는데 있어야 할 필수요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한국 입시미술의 기준이 과거 르네상스, 바로크가 가진 평가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개성보다는 고전주의적 스킬을 우선시 하여 이를 통해 높은 평가를 받아 합격한 학생들이 현재 대한민국 다수의 미대생들이다. 이러한 점이 엘그레코가 활동하던 시대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엘그레코 역시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이 미의 기준이었던 당대에 미술계에서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좋은 평가 역시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의 독특한 화풍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뒤늦게 인정받게 됐다. 현재 한국의 미대 지망생들은 높은 수준의 고전주의적 표현력과 스킬을 배우며 어렵게 대학에 입학하지만 현대미술이 더 이상 그런 능력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제껏 배운 것들을 모두 버려야한다는 허무함, 그에 따른 혼란을 느끼는 것이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이다.


 

수태고지/출처:museodelprado.es


비주류의 인생, 실패의 연속, 그런 떠돌이 삶을 산 엘그레코


 그리스 태생의 엘그레코는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라는 본명이 따로 있다. 16세기 중반 르네상스 미술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활동무대를 옮기며 이곳에서 그는 실제 이름보다 ‘그리스 인간’을 뜻하는 ‘엘그레코’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출신의 화가가 흔치 않아 이방인 취급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 최신 트렌드를 접하며 중세시대의 화풍에 갇혀있던 이전의 틀에서 벗어나 예술적 지평 넓혀 나간다. 특히 스승으로 추정되는 티치아노, 매너리즘의 대가 틴토레토에게서 영향을 받았는데 그래서 인지 엘그레코 그림에서 드러나는 색채는 두 선배의 향기가 난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로마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당시 천재라고 불린 종합 아티스트 미켈란젤로의 존재는  이후 그가 미술을 대하는 방식과 철학 구축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그레코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시기에 그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인정을 받거나 유명한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그레코가 인정받기에는 당시 이탈리아 화가들 간의 경쟁은 너무나 치열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항상 비주류였다. 엘그레코는 주류가 되기 위해 또 다시 해가지지 않는 대제국 스페인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는 화가로서 출세를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인 궁정화가 되는 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만다.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의 눈에도 그의 그림은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궁정화가가 되기 위한 마지막 오디션에도 탈락을 하며 엘그레코는 결국 톨레도에 자리를 잡게 된다.
톨레도에 오기까지 그의 인생은 가혹할 정도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성공한 화가였다면 활동무대를 자주 옮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실패에 따른 떠돌이 운명은 이후 구축된 독창적인 예술성에 오히려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좋은 평가는 사후 300년 뒤에나 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엘그레코의 도시 톨레도 사진/ 사진:CLASICO:iAn

양면성을 가진 엘그레코와 톨레도

엘그레코가 선택한 도시 톨레도는 양명성을 가지고 있다. 삼면이 Tajo강으로 둘러싸인 톨레도의 어원은 라틴어 ‘Toletum’으로 요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최적화 된 지리적 요건 덕분에 이베리아 반도의 수도로서 역할도 수백년간 해왔다. 마치 강으로 둘러싸인 섬처럼 고립되  있다. 이런 지리적 폐쇄성 뿐만 아니라 종교적 엄숙함은 엘그레코가 활동했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 톨레도의 특징이었다. 수세기 동안 스페인 카톨릭의 중심지였기에 종교적 신앙심은 남달랐고 타 종교에 대한 관대함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이슬람인들과 유대인들은 종교적 이유로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전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톨레도는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11세기 카스티야의 알폰소6세가 톨레도를 재탈환하기 이전까지 톨레도는 약 4세기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세력은 톨레도에서도 다방면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는데 특히 번역 사업에 큰 공을 세웠다. 중세 시대에 종교적인 이유로 유럽이 거부했던 그리스의 인본주의적 자산인 철학, 의학, 천문학, 수학, 과학 등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이는 다름아닌 이슬람인들 이었다. 그 결과 서구 유럽을 능가하는 문명의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 이들이 과거 그리스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에 큰 열을 올린 이유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배자였던 당시 이슬람인들은 종교적으로 관대하여 카톨릭, 유대교 등에게도 신앙적 자유를 주었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능력이 뛰어난 지식인들에게는 우대를 해주었다. 이들 학자 중에는 다수가 유대인들이었다. 이런 전통은 계속 계승되어 12세기부터 14세기 톨레도는 가장 큰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카톨릭 세력이 톨레도를 재탈환한 뒤에도 능력이 되면 유대인이냐 이슬람인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슬람이 남겨준 서재들이 이제 반대로 유럽의 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톨레도는 지식산업으로 유럽에서 가장 수준 높은 도시였고 트렌드를 주도하는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중세말의 뉴욕과 같은 역할을 한 도시가 된 것이다. 이런 톨레도를 만든 것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개방성’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톨레도 역시 전형적인 유럽국가의 모습이 아닌 유대인, 이슬람의 문화가 다양하게 섞여 있다. 톨레도에서 번역된 책들은 이후 이탈라아에 수출되며 르네상스 탄생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여러 민족의 다양함으로 인해 번창한 도시가 17세기 이후에는 수도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발전이 멈추게 된다.
다양한 문화의 유입과 개방성으로 발전한 톨레도였지만 쇄락의 길로 접어드는 16세기 말 종교적으로 가장 폐쇄적이고 고립된 도시에 엘그레코가 오게 되었다. 그런 엘그레코와 톨레도는 닮은 구석이 있다. 엘그레코도 톨레도 처럼 그리스부터 이탈리아를 떠돌아 다니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관을 넓혀나갔다. 중세식 종교화만 그리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몸으로 체험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출세의 욕망 따라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터전은 문화적으로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톨레도였다는 점이 조금은 아이러니 하다. tajo강으로 엘그레코를 가두어 버린 톨레도는 종교적 신비로움이 가득한 영적인 도시였다. 마치 san francisco같은 은둔 수도사처럼 봉쇄수도원 같은 톨레도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것이기도 하다. 바깥 현실 세상을 등지고 그가 몰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종교적로 신비로운 영적 세상이었다. 과거 중세식 종교화를 시작으로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는데 스스로 ‘신을 위한 화가’를 자처한 것을 미루어 보아 그의 예술 영감의 원천은 신앙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엘그레코와 톨레도는 겉으로는 종교적으로 매우 엄숙하고 폐쇄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감춰진 이면엔 문화적으로 개방적인 르네상스 정신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성령강림/출처:museodelprado.es

톨레도의 매너리즘에 빠진 엘그레코

엘그레코가 처음부터 기괴하게 그리는 화가는 아니었다. 이탈리아 시기만 해도 투박하긴 했으나 밝고 화사한 컬러를 구사했다. 그런데 톨레도에 오면서 그의 그림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말년엔 고전시대 화가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에 가까운 표현까지 하게 되었다. 왜 그의 그림이 이상하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가 없다. 하지만 그런 변화에 톨레도의 환경이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16세기 말 톨레도는 반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깊은 신앙심과 함께 금욕적인 생활을하면 절대자나 성령과의 영적 교감을 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사상이 유행했다. 로마보다도 카톨릭의 신앙심이 더욱 강열했던 고립된 톨레도 특유의 문화는 엘그레코에게 신선한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스스로 ‘신을 위한 화가’라고 했을 정도로 엘그레코 역시 카톨릭 신앙심은 남다른 화가였다. 그런 그에게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 초월적인 세상, 예수그리스도, 성모마리아 그리고 여러 성인들의 신성함, 고귀함을 표현하기 위해 르네상스의 합리성과 이성에 의한 작업 방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종교화는 본래 인간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그림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절대자를 위한 그림이다. 절대자의 숭고함과 존재를 인간의 이성 따위 판단으로 느끼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엘그레코의 그림 역시 이성적인 관점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다. 마치 현대미술의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을 이성적인 눈으로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이미 시대를 앞서 현대 초현실주의자의 관점으로 새로운 종교화의 대안을 보여줬다. 하지만 당시 카톨릭의 주류 사회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이었다. 그래서 엘그레코는 당대의 그림 수요층이었던 수 많은 성당들과 그림의 스타일을 두고 많은 갈등을 겪었다. 실제 법정분쟁까지 가는 경우도 많았다. 흥미롭게도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던 엘그레코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성당의 성직자들이 아닌 톨레도의 평범한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엘그레코의 그림은 절대자의 존재를 느끼게 해줄 만큼의 초월적인 힘과 그들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을 깬 ‘매너리즘’화가들

‘매너리즘’의 어원 Manierismo는 본래 ‘양식’ 혹은 ‘스타일’을 뜻하는 말이다. 이런 말이 보수적인 르네상스 미술학자들 사이에서 이전 양식을 천박하게 모방을 의미하는 뜻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왜 본래 의미와 다르게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시기로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사이로 바로크와 르네상스의 중간 과도기이기도 하다. 20세기 이전까지 학자들은 이 짧은 시기를 발전이 지체된 시대로 분류하며 당시 활동했던 화가들을 수년간 멸시했었다. 현대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에 갇혀 발전이 없는 무기력함에 빠진 상태를 ‘매너리즘에 빠졌다’라고 흔히들 쓰는 듯하다. 그런데 과연 엘그레코로 대표되는 ‘매너리즘’시대의 화가들이 정말로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볼 수 있을까?
15세기부터 유행한 르네상스 미술은 미술사의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다보니 화가 스스로의 개성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단서는 어떤 고전 미술관에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누군가가 미술의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로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감상한다고 했을 때 화가의 이름을 보지 않고 그림만으로 구별할 수 있는 화가의 작품이 얼마나 될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이 아름답고 세련되게 잘 그려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과도하게 서로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개성을 내던져 버린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그림은 그리스 신화나 종교적 메시지 전달력이 중요했고, 그것을 클라이언트의 취향에 맞게 우아하게 잘 표현하면 충분했다. 화가만이 가진 독창성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그림을 아름답게 객관적으로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런 공식에 충실하게 따르는 화가가 성공을 했다. 그리고 성공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면 좋은 그림이었다. 뻔한 구도, 지루한 안정성, 정해진 색채, 틀에 박힌 포즈, 몰개성 등 말 그대로 발전이 없이 매너리즘에 빠졌던 화가들이 실제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행을 따랐던 주류 화가들이었다.
그런데 미술사에서 비난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르네상스의 말기 비주류 화가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진 당사자들인 르네상스 중심 시대의 이름 값하는 화가들은 면죄부를 받고 미술사에서 과도한 찬사를 받아왔다. 그렇지만 실제로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평가 받아 왔던 ‘매너리즘’시대의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한계를 극복하고 회화의 다양한 실험과 혁신을 주도했던 예술가들이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화가들이 아니라 정 반대로 매너리즘을 깨버린 화가들인 것이다. 틀을 깨는 구도와 기괴한 인체 비례, 파격적인 색채, 교과서적인 원근법의 이탈 등은 300년 뒤 현대미술의 방향을 처음으로 예견한 시기였다. 그중 엘그레코는 더욱 특별하다. 왜냐하면 고전주의 미술관에서 사전 지식이 없이 이름을 몰라도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쉽게 구별이 되는 유일한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엘그레코의 그림에는 다른 화가들이 갖지 못한 독창성과 특유의 아우라가 있다. 결국 그는 화가의 독창성과 개성이라는 개념을 미술사에 처음으로 등장시킨 화가로 남게 된 것이다.

톨레도의 야경/ 사진:CLASICO:iAn

매너리즘 화가가 매너리즘에 빠진 많은 수많은 현대인들에 주는 메시지

현대 사회에서는 ‘열린’ 혹은 ‘소통’이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이 말들은 겉으로는 관대해 보이고, 이해심이 많아 보인다. 따뜻하게 포옹해주는 긍정적인 의미들을 연상케 한다. 반면에 ‘고립’과 ‘단절’이라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듯하다.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관과는 동떨어져 제멋에 빠진 사람들, 주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며 외로운 길을 혼자 걷는 사람들,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을 포함하는 의미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소통’과 ‘열림’의 성향은 우리를 외향적이고 사회성이 좋은 호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어떤 주장이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는 수동성, 모든 논쟁의 이견들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우유부단함, 누구에게나 착해 보이려는 비겁함은 자신만이 가지는 영혼의 색깔을 모두 회색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만약 엘그레코가 소통과 열림의 아이콘 이었다면 좀 더 편하게 화가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클라이언트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돈도 잘 벌고 굳이 타지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도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당연하게도, 여느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처럼 평범했을 것이며 이미 역사 속에서 잊혀져 언급조차 되지 않는 존재로 사라졌을 것이다. 결국 주류 미술계와 트렌드로 부터의 철저히 고립되고 단절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엘그레코다운 그림이 탄생된 것이다.
톨레도 역시 무릇 수도가 해야하는 마땅한 역할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했다면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자리잡고, 그저 뻔한 아파트촌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톨레도의 종교적 폐쇄성과 고립은 시간과 외부세계가 가져올 무분별한 몰개성과 파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했다. 덕분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톨레도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굳이 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많은 관광객들을 저절로 오게 만드는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엘그레코의 그림은 20세기가 된 지금 그의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남과 너무나 다른 색깔 때문에 외면 받는 수많은 엘그레코들은 지금도 무시 받으며 홀로 외로운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가 보았을 때 꽉 막힌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어쩌면 비겁함에 맞서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용기있는 고립을 선택한 사람일 수도 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반대로 따뜻한 온기가 필요할 때는 문을 닫을 필요가 있다. 누구나 인생에서 자신만의 따뜻한 공기와 강한 향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가끔은 과감한 단절과 고립이 필요할 것이다. 단절과 고립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위대한 고립을 선택한 매너리즘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엘그레코의 그림은 지금도 기괴한 빛과 색으로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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