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가을. 뾱이가 만춘에게
만춘! 내가 분명 8월까지 편지를 쓰기로 했는데 지금 글을 쓰기 시작한 날은 10월 15일이야. 일단 무릎 꿇을게. 짬짬이 일기장에 '만춘에게 편지 쓰기'를 to do list로 올리곤 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어. 이상하게 나의 진심을 늦게 알아채서. 서둘러 말하면 내 진짜 생각에 가짜가 섞일까 봐 걱정이 되었어. 역시 사람보다는 원숭이 정도의 좀 더 단세포로 태어났어야 했을까. 언제쯤이 돼야 바로바로 내 생각이 자유의지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까. 그래서 팟캐스트를 하는 네가 참 대단하게 느껴져.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말할 줄 아는 네가 정말 멋져. 2달간 꾸준히 너에게 할 말을 생각했는데 그건 바다에 대한 거야. 내가 서울을 떠나게 된 이유 중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떳떳하게 바다 때문에 강릉에서 살겠다고 말하지 못한 이유를 풀어볼까 해.
그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지난겨울 편지를 잘 읽었어. 편지에는 강릉의 여름에 대한 너의 기대감이 느껴졌는데, 제일 더운 주간에 와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침실에만 에어컨을 둔 집에서 널 40도의 여름을 보내게 할 줄이야. 더위가 가시지 않는 강릉의 여름밤을 또 너는 어떻게 현명하게 보냈을까 궁금해.
편지 속에서 추천한 '남궁인 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글도 읽어봤어. 정말 재밌더라. 논문 수준으로 인용 횟수를 세어가며 남궁인 선생님의 자의식을 분석하는데 재밌었던 것은 내용과 상반되는 정중한 말투야. 기분 나쁘면 소위 '하남자 특'이 되기 때문에(요즘 내 학생들에게 배운 유행어야. 지질한 사람의 특징이란 뜻 이래) 끝까지 웃으며 읽어하는 그 말투가 좋았어. 나는 그러지 못했던 거 같아.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 안 하는 것이 좋다.'라는 말처럼 상대가 민망해 할 수 있다면, 침묵하는 것이 배려인 줄 알았어.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지. 나는 내 새치를 보면 못 본척 하는 것보다 뽑아주는 게 좋고,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면 말해 주는게 좋아. 잠깐의 수치심은 웃어넘길 수 있으니까. 그렇게 정면 돌파하듯 써 내려간 것 같아서 멋졌어. 좋은 글 추천해줘서 고마워. 찬 바람에 경포호수를 걸을 수 없게 되면, 다시 또 읽어보려고 해.
편지 제목을 ‘어떻게 위생요인이 바다일수 있나’라고 쓴 이유를 이제 설명해볼까 해. 이 생각은 내가 고3 학생들이 대입 자소서 쓰는 걸 도와주면서 떠오른 생각이야. 고3 윤호(가명)는 모 대학 경영학과를 지원하면서 자신의 강점을 이렇게 썼어. '반장이 돼서 공용 탈취제, 화장지, 물티슈 등 비품을 구비하는 헌신을 보였습니다.' 좋은 점이지만 이걸 더 멋들어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허즈버그(Herzberg)의 2 요인 이론'을 떠올렸어. 경영학에서 배워서 만춘도 기억할 거 같아. 불만족과 만족의 요인이 각기 다르니까 둘 다 챙겨야 한다는 거야. 왜냐? 만족스러운 부분이 많아도 불만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없기 때문에.
2 요인 이론은 '동기-위생 요인 이론'이라고도 불리는 데 그건 불만족을 줄이기 위한 요소가 위생과 관련된 요인이기 때문이야. 업무 환경, 월급 같은 거지. 만족도를 높이는 요인은 동기 요인이라고 불러. 일을 할 때 성취감, 인정받고 성장하는 느낌을 말해. 일하는 게 재밌어도 생활비 빼고 남는 돈이 없다면 꾸준히 이직 생각이 나겠지? 반대로 아무리 쾌적한 환경과 좋은 급여를 받더라도 일에서 기쁨이 없다면 일을 대충 하게 된다는 거지. 좋은 조직을 만들려면 리더가 두 요인 모두 챙겨야 한대. 마침 윤호는 학급 내 스터디를 운영해서 동기 요인을 끌어낸 경력까지 있었어. 그래서 윤호는 위생, 동기 요인을 모두 끌어낸 리더로서의 강점을 자소서에 어필할 수 있었어.
자소서 시즌을 보내고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어.
사람마다 2 요인이 다르지 않을까? 입찰과 발주 업무를 담당해서 보통 다섯 개의 엑셀 시트를 다루는 내 친구는 본인은 하고 싶은 일 없어서 안정적인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했어. 그런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내가 키보드 치는 속도보다 컴퓨터가 느리면, 내가 얘보다 더 빠른 거 같아서 기분이 좋다?' 그 친구는 컴퓨터를 이길 때 느끼는 성취감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도 시도해 봤는데 그냥 답답하기만 하더라고. 친구만의 동기 요인이었던 거지.
그럼 나는 어떤 위생 요인이 있을까? 나는 그게 바다 같아. 바닷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서울에 살 때는 나는 바다가 그리웠어. 근데 막상 가면 신나지는 않았던 거야. 여행으로 가까스로 닿은 니스의. 푸껫의, 냐짱의 바다를 보면 5초간 신났다가, 이게 다 무어 람 밥이나 먹자! 라며 곧 바다를 등졌어. 그땐 변덕이 심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1년간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 내게 바다는 동기 요인처럼 행복을 주는 건 아니지만 불행을 잠재우는 역할을 하더라고.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바다를 봐. 그러면 못다 한 잠이나 출근 스트레스 같은 불만족이 어디론가 가라앉아. 어제는 자다가 새벽에 잠깐 깨서 창가로 향했어. 캄캄한 바다에는 오징어 배가 반짝거렸어. 땅에 떨어진 별 같아서 보다가 다시 자러 갔어. 일기에 쓸 만큼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바다를 보고 있으면 일기를 쓰는 내가 좋아져. 엄청난 삶은 아니지만 시시콜콜한 일들로 빼곡한 일기장을 가진 내 삶이 마음에 들어.
하지만 이게 내 자유의지가 아닐 수도 있겠지. 서울을 버리고 온 만큼 강릉 살이에서 얻어가려는 보상심리가 일 수도 있어. 괜히 바다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 만약 서울에서 적당히 쾌적한 집에서 살았더라면 이런 말은 쏙 들어갈 수도 있겠지. 강릉 오기 전에 살던 서울 집은 성냥갑처럼 참 좁아서 방공호 같았으니까. 바다가 내 위생 요인이라니 가능한 일일까? 만춘 너는 어때? 너의 생각을 듣고 싶어. 아니면 만춘은 어떤 위생 요인을 가지고 있어? 이것만 있으면 불만족을 잠재울 수 있다. 하는 것이 있어? 그런 게 있다면 다음에 우리 집에 올 때 준비해 볼게. 오랫동안 날 예뻐해 준 만춘이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하고 싶어.
추신: 쓰다 보니 글이 기승전결은 없고 기기기승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허허. 다음에 열리는 글쓰기 수업은 꼭 들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