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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Mar 06. 2022

(6)진상 편집자가 되고 말았다

리커버도 아닌데, 표지를 두 개나 만든 사연

고백컨대 나는 진상 편집자였다. 이번 책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를 만들면서 지난 3개월간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없이 수정을 요청했다. 그들의 작업물은 환상적이었다. 나는 표지를 받아보고 물개박수를 치며 그들을 안도하게 만들어 놓고는, 뒤돌아서서 안절부절하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한 번 더' 수정을 요청하곤 했다. 편집하는 동안 책의 컨셉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무려 '시안'이 아니라 '완성된 표지'가 두 개나 나오고 말았다.


출처: 민음사 천재 디자이너와 함께 북 디자인 A to Z 【말줄임표 EP23】 민음사TV/ https://www.youtube.com/watch?

부연 설명: 민음사의 최지은 디자이너(위)와 정기현, 이화진 편집자(아래)가 표지 만드는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수정을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다. 다만 디자이너가 표지 시안 하나하나에 들이는 공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컨셉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게 좋다. 그렇다고 이 두 분의 편집자가 나 같은 진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저는 시안이 아니라 표지를 두 개 만들었거든요...)  


이 시리즈의 제목이 '울면서 달리는 편집자K의 마감 일기'인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디자이너한테 수정을 요청하기 전날 밤이면 잠을 설쳤다.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수정에 수정을 요구해서 작업자를 힘들게 하나, 결정을 번복하는 클라이언트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나는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북디자이너 키박과 일러스트레이터 요기보이는 나보다 더 울고 싶었을 것이다. 이번 글은 나 때문에 고생한 작업자들을 향한 고해성사쯤 되겠다. 리커버를 한 것도 아닌데, 표지를 두 개나 만든 사연을 일지로 적어봤다.




2021년 8월 7일

: 1차 스케치 받고 기분 째진 날

 

이 시안을 보고서 처음 든 생각. 일러스트레이터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내가 원하는 느낌을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지? 최선을 다해도 목표에 가닿을 수 없는 MZ세대의 울분을 표현하는 인물로 20대 여성을 그려달라고 주문했는데, 이 컨셉을 명확하게 반영한 그림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실력에 감탄하며, 북디자이너와 논의해 자잘한 수정 사항을 정리해 이메일로 보냈다. 채색까지 더하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만 해도 설렌다.  


2021년 8월 9일

: 어마무시한 원고가 들어왔다

책 전반의 컨셉을 뒤흔들 만한, 어마어마한 원고가 들어왔다. "누구나 귀여운 할머니가 될 순 없지만"이라는 제목의 이 원고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윤여정 배우처럼 전문직으로 성공하지 못해도, 밀라논나처럼 화려한 이력이 없어도, 박막례 할머니처럼 자신을 챙겨줄 손녀가 없어도, 가난한 할머니로 늙을지언정 친구와 서로서로 도와가며 함께 늙어가겠다는 글에 나는 반해버렸다. 이를 테면 이런 대목이다.


"전 귀엽고 재미있는 할머니는 못 될 것 같아요. 그건 돈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아."
다정하고 상냥한 나의 선배는 이렇게 답했다.
"무슨 소리야.우리는 서로를 도울 거야. 너는 날 안 도울 거야? 난 너를 안 도울 것 같아? 재미있는 할머니 안 되어도 괜찮아. 우리는 서로를 도울 거야. 걱정하지 마."


편집자로서의 촉수가 움직였다. 이거다, 이게 바로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글을 내세워야 해! 그리고 표지에도 그려 넣어야 해! 그런데 어떻게? 이미 일러스트 스케치 수정도 끝내고, 채색 작업만 남은 이 시점에? 20대 여성만 가득한 표지에 '할머니'를 어떻게 그려넣어? 어디를 어떻게 바꿔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컨셉이 '울면서 달리는 MZ세대'에서 '비혼의 할머니'로 바뀌었으니 수정해달라고 말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표지 어떻게 하지...불면의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2021년 8월 12일

: 디자이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유

며칠을 끙끙 앓았다. 수정을 할 거면 하루라도 먼저 얘기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디자이너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일러스트 컨셉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자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투명하게 얼어버렸다. 울상이 되어 그는 말했다. "표지를 아예 갈아엎어야 할까요? 제가 일러스트를 성급하게 발주했나봐요. 어떻게 하면 좋죠.."

자책하는 디자이너를 보니 미안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도망갈 수가 없다. 내가 싼 똥은 나아니면 치워줄 사람이 없다. 애초에 책 컨셉을 명확하게 잡지 못해 일어난 일이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 이 사태를 최대한 빨리 해결하기 위해 디자이너와 함께 머리를 쥐어짜냈다. 전반적으로 기존 시안을 유지하되, 표지의 중앙에 할머니를 그려넣는 걸로 수정 요청을 하기로 했다.

일러스트레이터한테 연락해보니 다행히 아직 채색 작업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여차저차 전후 상황을 설명하며 나는 스케치 일부를 수정해주십사 부탁했다. 한참을 조용히 듣던 일러스트레이터는 말했다.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과연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한 작가는 최대한 빨리 스케치를 넘겨주기로 했다. 통화를 마치고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2021년 8월 27일

: 여보시오, 동네 사람들~ 이 귀여운 표지 좀 보소~   

드디어 표지가 나왔다. 웹툰 같은 발랄한 느낌에, 웃기고도 슬픈 느낌이 맘에 아주 쏙 든다. 이게 다 손이 빠른 일러스트레이터와 북디자이너 덕이다. 요기보이가 건네준 그림에 키박이 만든 폰트를 제목에 얹고, 구도와 색상을 조율해서 완성도를 높였다. 아름다운 프로들 같으니! 숱한 수정 요구에도 불구하고 요기보이는 "피드백 주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라며  끝까지 쿨한 태도를 유지했다.

단톡방마다 표지를 보여주며 자랑했다. 저자와 친구들의 반응은 괜찮았다. 1년 가야 책 1권 읽는 가족들도 이 책만큼은 재미있겠다며 관심을 보였다. 자려고 누웠는데 헤실헤실 웃음이 세어 나온다. 자식새끼 밥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부모 심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표지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본문 편집만 무사히 마치면 되겠군.




2021년 9월 1~3주

: 본문을 편집하며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표지 컨셉을 살짝 바꿨으니, 본문도 중요도에 따라 원고를 재배열해야 할 터.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부터 전면에 배치했다. 문제의 '할머니’ 원고를 프롤로그로 옮겼다. 앞에서 노년을 상상했으니, 이 흐름에 따라 본문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부모와 불화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실컷 하고 나서, 일에 관한 챕터로 넘어가니 김송희라는 작가가 입체적으로 이해되었다. 서울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취향껏 공간을 꾸미며,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려는 것은 모두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함이었다. 혼자서 고양이를 키우며 비혼으로 사는 것도. 그제야 모든 원고가 제자리를 찾았다. 100점짜리 테트리스처럼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편집을 하고 나니, 표지에서도 할머니를 더욱 강조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완성된 책 표지를 보면 일에 대한 고민이 많은 20대가 흥미를 느낄 것 같았다. 그러나 저자는 30대이고, 이 책을 편집하는 나 역시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일에 관해 고민하지만 이제 그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혼자서 열심히 해서는 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한계가 있고, 누군가와 연결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저자는 비혼이고 나는 기혼이지만, 우리는 언젠가 1인 가구될 테고 서로 돕고 연대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을 언젠가부터 삶의 목표로 삼았다. 현재의 표지로는 이런 내용을 담아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표지를 놓고 또다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2021년 9월  27일

: 텀블벅 썸네일 이미지 괜찮은데?


텀블벅 펀딩을 앞두고 썸네일을 제작했다. 표지 일러스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 할머니와 고양이가 맥주잔을 부딪치는 모습을 부각해서 썸네일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렇다면...

저 창문 속 할머니를 메인으로 내세운 표지 이미지가 자꾸 떠올랐다. 표지 완성본을 받은 게 8월 말이고, 텀블벅 펀딩을 10월 초에 시작했으니 일러스트 작가한테 연락하기에도 애매한 시점이었다. 이미 작업이 끝나서 잔금까지 치른 뒤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다가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할머니 컨셉의 표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디자이너한테 얘기해서 기존의 일러스트를 활용해서 표지를 재가공해보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개진상이다.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몰라하는 편집자에게, 북디자이너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지금 포기하면 후회하실 거예요. 마음에 들 때까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요!" 그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표지 공사에 나섰다. 전생에 내가 무슨 복을 쌓았길래 이런 디자이너를 만났을까.  


2021년 10월  7일

: 해물탕 재료로 부대찌게를 끓이려면

기존 일러스트에서 요소를 따서 이리저리 붙여보던 디자이너는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제목 크기도 키우고 할머니 이미지도 키웠지만 어딘지 허랑하다. 여기에 띠지를 둘러봐도 뭔가가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다하다 안 되자 디자이너는 말했다.


“해물탕 재료로 부대찌개를 만들려고 하니까 맛이 안나요. 지금 시안은 니 맛도 아니고 내 맛도 아니고, 이렇게는 안 되겠어요. 햄이랑 당면 사리가 필요해요! 표지 하단에 들어갈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는데요?"  


그랬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봤다. 나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길고 긴 메일을 보냈다. 컨셉이 한 번 더 바뀌었고 우리가 이걸 이렇게 저렇게 바꿔보았는데 도무지 각이 안 나오니, 추가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이었다. 물론 추가 비용을 함께 제시하기는 했다.

9~10월이 되면 일러스트레이터는 쉴 새 없이 바쁘다. 일러스트 페어가 집중적으로 열리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요기보이 작가도 페어를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거절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계약서에도 없는 수정 요청이었다. 그럼에도 요기보이 작가는 긴 침묵 끝에 수정을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입으로는 부탁하고 있었지만 몸으로는 이미 무릎을 끓고 읍소하는 심정이었다. 이런 간절함을 알아준 걸까. 내 사정을 이해해준 것도 있지만,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자기 작업이 이런 식으로 누더기가 되어 나가는 것을 그 역시 허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송구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두 번째 표지가 완성되었다.






멀리도 돌아왔다. 누군가는 첫 번째 표지가 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다고 했다. 인쇄소에 가기 직전까지 나도 고민했으나 두 번째 표지로 가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이 책의 독자는 30~40대 여성이 될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이 예상은 적중했다. 출간한 지 세 달째,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의 구매자는 70퍼센트 이상이 30~40대 여성이다.


표지는 다시 봐도 마음에 쏙 든다. 본문도 마찬가지다. 고생한 북디자이너 키박, 일러스트레이터 요기보이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나도 이번 책을 만들면서 많이 배웠다. 다음 번 책은 본문 분석을 좀 더 꼼꼼히 하고, 컨셉을 명확히 한 후에 표지를 발주해야겠다. 편집자의 일은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것 같다. 이연실 편집자는 <에세이 만드는 법>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디자어니거 이번 작업은 유난히 힘들다고 말할 때, 진짜 이런 상황에서 또 수정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화낼 때, 그래도 '한 번 더' 한 걸음만 더 가보자고 정성껏 설득하고 그의 생각을 묻는 것까지가 내 일임을 안다. '눈물의 계단'을 몇 번이고 오르내리며 고민하고 조율하는 것 모두 온전히 나의 일임을 안다. (중략) 나는 그저 입으로 '한 번 더'라 청할 뿐이지만, 오늘도 화면 앞에 앉아 한 차례의 전투를 더 치러야 할 디자이너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는 거기까지가 바로 나의 일, 편집자의 일이다."


나를 스쳐간 북디자이너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나는 과연 용기와 믿음을 주는 편집자였을까.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나와 팀을 이룬 디자이너들은 단 한 번도 책을 포기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음 번 책도 최선을 다해 만들 것이다. '한 번 더'를 말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외칠 것이다. 그것이 편집자인 나의 역할이므로.(그렇다고 표지를 또 두 개나 만들겠다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 디자이너를 이렇게 힘들게 했다가는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디자이너도 못 구하고 구천을 떠도는 수가 있답니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다음 번 책 디자이너가 도망갈까 봐 두려워서 하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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