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꿀 떨어지던 순간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잖아요.
21년 1월 17일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나의 소중한 ABC 씨.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네요. 이번 1월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리네요. 내릴 때마다, 하얗고 크고 예뻐서 다음날의 출근길의 피곤함 따위 잊고 아름다움에 푹 빠집니다. (내일 출근하시나요? 그럼 꼭 따뜻한 옷과 신발을 챙기세요. 아! 장갑도요.) 이런 밤에 당신이 생각난 건 우연이 아니겠지요. 모든 인연을 소중히 한다는 당신의
지난 편지의 말이 떠오릅니다. 이런 분과 이렇게 편지를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는 나름 바빴어요. 아침부터 옷을 찾는다고 좁은 방을 헤집었죠. 엄마는 미리미리 안 찾아 놓는다고 큰 소리를 냈고, 저는 도대체 내 옷은 다 어디로 갔느나며 짜증을 냈습니다. 아! 서른도 넘은 나이에 옷 하나 가지고 엄마에게 짜증 내는 저를 보며, 멋쩍게 느낄 당신이 표정이 그려지네요. 모르겠어요. 나이 먹어도 엄마에게는 응석을 부리게 되나 봐요. 그리고는 제가 애정 하는 대학 친구들을 만나러 갔어요. 요즘 코로나가 기승이라, 밖에서 만나는 건 상상도 못 해요. 안온한 친구 집에 가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시켜먹고 ( 제 친구는 워킹 맘이라, 맛있는 음식을 시켜주는 것을 좋아해요. 워킹 맘의 하루는 녹록치 않더라고요), 친구 여섯 살 난 아들의 에너지를 보며 감사한 시간을 보냈어요. 아! 친구 집에는 친구 아들과 똑같이 생긴 남편도 있었어요. 우린 동갑이라 편하게 말 놓으면서 근황을 얘기하곤 합니다. 다른 친구도 최근에 결혼을 했어요. 제가 명 축사를 해 준 친구죠. 가정이 있는 친구들에게 제일 부러운 건, 아파트가 있다는 거예요. 저는 언제 서울 하늘 아래, 내 명의로 된 아파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조언해주신 것처럼, 청약은 꾸준히 넣고 있어요. (언젠가 되는 날이 오겠죠? 음음,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 줘요). 대학 친구들은 언제 만나도 좋아요. 만나면 항상 배울 점이 있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앞으로도 오래오래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랍니다. 언젠가 소개해드릴게요!
그리고는 지금은 눈 내리는 큰 창이 보이는 안온하고 따뜻한 우리 집입니다. 집에 돌아온 후, 급히 브런치에 글을 썼어요. 올해 제가 시작한 모임이 있는데 ' 글로 모인 사이'라는 일종의 클럽이에요. 혹시 제가 일전에 좋아한다고 했던 '건지 감자 껍질 북클럽'이란 책 기억나세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작은 건지 섬에서 있었던 북클럽 이야기인데요. 건지 섬사람들이 자주 먹던 감자 껍질에서 이름을 따왔대요. 거창하지 않지만, 내 주변에 있고 항상 먹는 감자 껍질로 이름을 붙인 것이, 책을 삶의 작은 일부로 여긴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요. 책을 읽을 때마다, 꼭 내가 그 북클럽 회원인 것 같아서 어찌나 행복하던지요 ( 참, 넷플릭스 영화로도 나왔어요. 여주는 제가 좋아하는 릴리 콜린스예요. 영화도 참 좋습니다. 그렇지만 책은 더 좋으니, 책부터 먼저 보시길). 무튼, 제가 너무 갑자기 책 얘기를 많이 했죠? ‘글로모인사이'가 요즘은 제게 건지 감자 껍질 북클럽 같은 존재예요. 매주 같은 주제로 여러 명의 회원들이 글을 씁니다. 글을 습관화해서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한 주가 다 지난 일요일 밤에서야 글을 쓰네요. 이마저도, 이 클럽을 하지 않았다면 소중한 이 하루를 또 흘러 보냈겠죠. 글을 쓰게 되기까지는 힘든데, 쓰는 순간은 그 무엇보다 행복해요. 그래서 제가 편지도 자주 쓰나 봐요.
좋아하는 글을 마무리하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어요. 행복한 밤이네요. 오늘도 즐겁게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대나무 숲 같은 사람이에요. 오늘도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 새, 눈발이 거세진 밤에 사랑을 보내며
소네치카 올림
수신자가 모호한 이 편지는, 서간체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느낌을 조금 담아 보았습니다. 오늘 하루를 애정 하는 이에게 담담히 읊는 것처럼 써보았어요. 서간체 소설은 화자와 동화되는 느낌을 받아서 저는 좋아해요. 편지에서 느껴지는 화자의 고조되는 감정, 물들어 가는 사랑, 고뇌하는 문체, 스며져 나오는 유머를 애정 합니다. 신기한 건, 화자가 읊는 본인의 이야기인데, 때로는 본인의 감정과 실제가 다르다는 게 느껴져서 흥미로워요. 솔직한 건 역시 어렵구나 라는 걸 느껴요.
서간체 소설뿐만 아니라,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일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사이여도 항상 좋을 수만 없잖아요. 싸우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편지로 마음을 전할 때만은 시작과 끝까지 모두 애정 하는 마음을 담습니다. 화나고 미운 마음으로, 편지 잘 쓰지 않잖아요. 보통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눈빛을 요즘은 꿀 떨어지는 눈빛이라고 하더라고요. 눈빛은 순간이지만,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꿀이 떨어질 수 있으니, 사랑하는 사이에는 편지를 써 보는건 어떨까요! 사랑했던 꿀 떨어지던 순간이 기록이 오래오래 남을 수 있잖아요. 시간이 바래도, 그 순간 마음은 진실했을 테니깐요. 최근에 제 주요 플레이스트에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엄정화의 '호피무늬'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영원한 건 없다 해도 영원할 순간은 있어' 영원하고 싶은 순간, 영원하고 싶은 마음 편지에 담아보시기를, 건지 감자 껍질 북클럽' 소설책과 함께 추천합니다.
Ps. 올해 안에, ABC 씨 말고 실제 대상에게 편지 쓰기를 소망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