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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Apr 12. 2023

어른이 되면 괜찮아지나요?_ 08

멍 때리기

아주 오랜만에 한 시간 정도를 가만히 앉아있었다.

오후부터 끼던 먹구름은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 같았고 활짝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으로는 한 번씩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세차게 들어왔다.


오늘의 수업은 10시 50분이 시작이었다. 그 시간보다 십여분 이르게 도착하려면 집에서 50분 전에는 출발해야 했다. 출근 전에는 언제나 배를 든든하게 채운다. 그래서 아침을 거르는 직장인들에 비해 준비시간이 조금 더 길다. 8시 한번, 8시 30분에 한번, 마지막 9시에 한번 더 알람이 울리게 맞춰두었지만 오늘은 아무리 해도 일어나 지지가 않았다. 알람 소리는 들었지만 마치 누가 내 어깨에 올라타 있는 것 마냥 어깨는 무거웠고, 심하진 않지만 신경이 쓰일 정도의 두통도 있었다.

어젯밤에는 꿈을 꾸었다. 비가 오는 어두운 밤, 반려묘인 망울이가 비를 맞을까 담요로 돌돌 말아 품에 앉은 채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하고 있었다. 꽤 비싸 보이는 주택으로 들어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꿈속의 나는 결혼을 했고 남편은 나보다 일찍 집에 들어와 있었다. 남편은 집에 걸맞게 아주 말쑥한 차림의 남자였다. 연예인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닌 그 남자는 나의 꿈에 어떻게 등장했을까 하는 의문을 꿈속에서도 잠깐 생각한 것 같다. 나는 그와 말다툼을 했고 화가 난 그는 망울이를 내쫓았다. 그렇게 망울이를 찾다 어렴풋이 꿈에서 깼던 것 같다. 그 꿈 때문이었을까? 일어나서도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 기분은 오늘 하루를 통째로 삼켜버린 것 같다.

어떻게든 일은 했지만 모든 수업을 끝낸 오후엔 마치 모든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쓴 것 마냥 서있기도 힘들었다. 집으로 들어와 아침에 하지 못한 설거지를 하고 약간의 정리를 한 뒤 베란다 문과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감기기운 때문인가 싶어 엄마가 준 마른 생강을 넣어 차를 끓이고 텀블러에 담아 베란다 문 앞에 앉았다. 이제는 완전한 봄인지 세차게 바람이 불어도 그다지 차지는 않아 멍하게 앉아 옅은 회색과 짙은 회색 밖에 없는 하늘의 먹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멍 때리기를 곧잘 하지만 실제로 멍 때리기를 정의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명상이라면 명상이려나.

나의 홈요가 유튜브 선생님은 명상을 할 때 생각을 흐르는 대로 두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모든 기운 뺀 몸으로 가만히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이 들어왔다, 멈추었다,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 그렇게 앉아있다 보니 문득 그 과정이 마치 고춧가루를 빻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앗간에서 고운 고춧가루를 얻으려면 기계에 여러 번 빻고 넣기를 반복하듯이 나의 생각을 더 잘게, 잘게 부수어 어느새 다 흘러가버릴 수 있도록 생각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나가면 나가는 대로 그렇게 멈추고 생각하는 것을 반복해서 어느 순간 그 생각이 흘러가 버릴 수 있도록 그렇게 나만의 멍을 때리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생각을 잘게, 잘게 부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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