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많은 여름이었다. 높은 습도는 수많은 벌레들을 불러들였다. 자다가 이상한 기척에 불을 켜보면 어김없이 지네가 있었다. 구석구석 지네와 비슷하게 생긴 노래기도 기어 다녔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수많은 다리를 움직이며 나에게 다가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 긴장감에 신경이 쓰였다.
몸도 힘들었다. 아이들과 물놀이 갔을 때 몇 개 집어 먹은 김밥에 탈이 났다. 계속 잠이 왔고 구토와 설사가 나왔다. 내 몸에 쌓인 찌꺼기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역겨웠다가, 익숙했다가, 지겨웠다가 하는 그런 식중독의 증상들. 2주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무기력의 세계를 헤맸다.
마음도 힘들었다. 아이가 받아온 여름방학 숙제는 매일 수학 1장 풀기였는데 그 간단한 문제도 아이는 어려워 끙끙댔다. 그 문제를 두고 매번 발전이 더딘 아이와 실랑이를 할 때에 인내심은 쉬이 끊겼다. 이것도 못 해?, 왜 못 해? 나는 분통을 터트리며 아이를 잡아댔다. 아이의 더딘 학습 능력에 조바심이 났다. 인내심 없이 아이에게 빨리빨리 배우고 잘하라고 채근하는 내 모습에 미움이 일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차 나의 감정은 폭주했다.
갑자기 숨이 막힐 듯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마당에 앉아 초승달을 보며 소리 내 울었다. 부러. 마음의 빗장이 풀린다.
긴 호흡으로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싶은데 육아와 가사는 자꾸 몰입을 끊었다. 두세 시간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소리 지르며 마당에다 읽고 있던 책을 집어던졌다. 젠장!
아이들이 나의 시간에 끼어들 때 나는 역정을 냈다. 그깟 내 시간이 뭐라고 나는 애들한테 화를 내는 걸까.
밥 달라고 졸라대던 애들은 어쩔 줄 모르고 따라 나와 나를 달랜다. 이런 엄마라서 애들이 혼란스러울까 봐, 감정적이고 모순적인 엄마를 싫어하게 될까 봐 우는 것이 후회되고 스스로를 혐오한다.
어쩔 수 없이 이런 게 나다.
육아보다, 사랑보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욕망이 커서 오롯이 나로서 헤매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이따구로 행동하는 거. 괴물 같은 나의 행동을 조금 합리화해 본다.
털고 일어나자, 아이들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가 엄마에게 일거리를 많이 주는 어린이라 미안해. 이런 어린이라..
젠장, 젠장..
애들이 이런 생각하게 만드는 내가.. 더없이 혐오스럽다.
그래도 이게 나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힘들지 않아도
이러고 마는 요상한 나.
이런 나를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9월 1일, 몸도 마음도 가뿐했던 날 예약했던 1박 2일의 북스테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9월이 왔지만 도무지 여름이 물러날 것 같지 않은 날이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친정 엄마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다. 나는 간절했으므로 지금 내가 해야 할 책임을 제대로, 기꺼이 해낼 마음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지금 여기'를 '탈출'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나에게로 와주셨다. 나는 안도했다.
집으로 멀어져야 할, 아이들로부터 떨어져야 할 이유는 감정의 과잉, 슬픔의 과잉에 있었다. 나의 문제였으나 거리를 두지 않고는 해결하지 못할 일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경북 상주에서 전북 완주로 가는 길.
네비는 고속도로를 추천했으나 부러 국도를 택했다. 상주에서 영동, 무주, 완주로 달리는 길에 자주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낡은 집, 슬레이트 지붕, 시멘트 돌담, 아직 여름색 짙은 파란 하늘 같은 것들을. 완주에 진입하자마자 순두부찌개 한 그릇을 주문해 먹었다. 맛집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고 단체손님과 혼밥 하는 손님을 위한 테이블도 많았다. 덕분에 혼자 밥을 먹어도 친절한 응대를 받을 수 있었다.
책구름 출판사에서 <우리의 영혼은 멈추지 않고>를 쓴 이화정 작가님의 프라이빗한 시모임을 하신다고 하셨다. 소양고택에서 1박 2일 머물면서 참가자들은 작가님으로부터 시 수업, 시 처방도 받고, 북토크에 참여도 할 예정이었다. 소양고택 대표로부터 고택 설명도 들을 것이고 와인파티도 하고 다음 날은 김용만 시인의 집에도 들릴 예정이었다.
이미 방전된 상태였던 나는 그저 이 모든 행사의 객, 그러니까 묻힌 존재로 숨어있고 싶었다. 나를 드러내는 순간,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처음 본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시 수업을 들으러 카페 두베에 갔다. 오늘 만난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나의 불안전한 감정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나의 감정도 낯선 이를 향해 마구 날 뛰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의 안도감을 줬다.
작가님은 우리가 이메일로 보낸 사전 설문지를 읽고 거기에 대한 시를 처방해 주셨다. 처방받은 시를 낭송하면 거기에 대해 작가님은 다정한 말을 덧붙여 주는 방식이었다. 나의 차례. 나희덕 시인의 <불 켜진 창>이였다.
불빛을 훔치려는 사람처럼
문이 아닌 창 쪽으로 가서 집 안을 들여다본다.
남편과 큰 아이는 장기를 두고 있고
접시에 남은 과일은 아직 물기 마르지 않았고
주전자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다
작은 아이는 자는가
나는 한마리 나방인 듯이
창문에 부대껴 서서 생각한다
그 익숙한 살림살이들의 낯설음에 대하여
부르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의 아득함에 대하여...
시를 읽던 나는 그 시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순간 울고 말았다. 뜨거워진 목울대를 눌렀지만 참을 수 없고 결국 울었다. 외출 후 '창 밖 어둠 속에 숨어서 오래오래 그 집안 풍경을 바라보며' 선뜻 생활 속으로 들어가기를, 내가 소모되는 것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나'가 그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두들 우는 나를 배려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어색하면서도 따뜻해서 시선이 비켜난 사각지대속에 앉아 차라리 참지 말자는 마음으로 울었다. 때론 멈출 수 없는 마음, 눈물, 감정이 기회를 잡고 자리 잡을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울고 나자 작가님은 이런 조언을 나에게 건넸다. 내가 sns에 올린 글에서도 감정을 터트리는 면이 있고, 참지 않고 내뱉는 문장들이 있는데 글 쓰는 사람이라면 조심해야 할 사항이라고. 나는 극도로 단어를 돌보고 아끼는 작가님 앞에서 감정을 마구 터트렸음이 문득 송구해졌다. 그러나 글에도 지금 나에게도 터트리지 못하고 정의되지 못할 감정덩어리들이 목구멍까지 차 있음을 말하지 못했다.
소양고택에 대한 해설도, 저녁 식사도, 북토크와 와인 파티도, 모두 끝나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에 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크고 작은 고민을 나누었는데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 나는 또 울고 말았다. 어떤 질문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았는데 나는 내가 육아를 하며 자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 아이들에게 함부로 할 때, 무너져버린다고 말했다. 울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고해성사하는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나를 설명할, 이 불안정한 감정을 언어화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난다.
그 자리를 파하고,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후련한 마음으로 후회했다. 아, 울지 말았어야 했어. 낯선 사람들 앞에서 무슨 꼴이람. 작가님 북토크에서 와서 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서 누를 끼치다니. 잠을 설치기엔 너무 울어 피곤했다. 나는 그날 밤, 낯선 룸메이트와 낯선 고택에서 포옥포옥 잘 잤다.
달게 아침도 먹고 산책도 했으며 울보라고 놀림도 받고 나는 실실 웃으며 1박 2일의 북 스테이가 나에게 준 의미를 떠올려봤다. 참고 있었던 감정을 숨기기에 실패했고, 아이들과 물리적 거리 두기에는 성공했으나 와서도 아이들과 심리적 거리 두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나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울음에 낯선 이들로부터 수용을 받았고, 이타적인 삶과 이기적인 삶에 대한 그들만의 생각도 격려처럼 받았다. 김용만 시인 집에서는 자신의 삶만큼 쓰는 사람, 삶과 글이 일치하는 작가의 생활을 보고 나도 욕심내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딱 나만큼 쓰면 되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뿐했다.
돌아와 달려 나와 안기는 아이들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 후로 10월 중순을 지나는 지금까지 함부로 감정을 토해내지 않고 있다. 내 시간을 침해받았다는 생각도, 내 삶이 없다는 생각도, 객으로 머물고 싶다는 생각도, 조바심도 없이.
아마, 나에게는 통곡의 시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삶의 한 구간에서 나의 힘듦을 참지 않고 터트리는 시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