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언제부터였을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는 누구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곤 했었는데.. 다른 사람의 감정과 아픔이 너무 많이 공감되어서 내 몸을 해치기 일쑤였던 내 자신이 이제는 노력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축복인 걸까?
어렸을 때부터 많이 의지하곤 했던 은사님을 찾아뵙는다. 아직 여름이 채 오지 않은 밤공기가 서늘하다. 익숙한 고가도로 밑의 으슥한 포장마차. 그 마이너 한 느낌이 날 편안하게 한다. 빨간색 천막으로 둘러싸인 포장마차에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들어서있다. 부부는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나이 든 중년 남녀와, 동창인 것 같은 남자들은 술이 거나하게 들어갔는지 신세타령이 한창이다. 은사님은 방금 들어왔는지 이제 막 겉 옷을 벗고 있었다.
“김 선생님~!”
“왔나? 오랜만이네~ 자 내 술 한잔 받게나.”
“선생님 잘 지내셨는지요?”
“응 난 잘 지냈지. 자네는 별로 잘 지낸 것 같지 않아 보이는군?”
“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가 제가 좋아했던 것들이 전혀 좋게 느껴지지 않고,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해져 잊히는 기분입니다.”
“인생은 상실의 연속이지. 좋은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가고 하루를 보냄에 있어 웃음을 하나둘 잃어 가며 나이가 들어가는 거야.”
“그렇다면 계속 상실하며 좋은 것들을 다 상실했을 때. 아직 수명이 많이 남아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렇게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야 하는 건가요?”
“껄껄껄.. 걱정하지 말게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면, 내가 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잃어버리는 상실의 재상실의 시기가 올 테니.. 그때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을 걸세.”
선생님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시원하게 술을 들이켰다. 상실의 재상실. 내가 상실했다는 것조차 상실하는 경지가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아직 내가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은 걸까?
선생님과의 짧은 술자리를 뒤로하고 난 새벽이 그린 길을 걷는다. 새벽의 공기는 고요하다. 적당한 빛과 적당한 소음. 적당한 사람들과 도로에 적당한 차. 낮에 그렇게 북적였던 도시의 많은 존재들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공허함이 좋다. 그 느낌을 느끼며 순간 피식 웃는다. 내가 좋아했던 것을 기억해 낼 때 나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간다. 많은 것들을 해결하고, 많은 것들을 채운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며, 달력에 빼곡한 일정들을 기입한다. 달력에 빈 날이 있으면 조바심 내며 무엇이든 채워 나가야 마음이 편하다. 잘 살고 있구나. 열심히 살고 있구나. 채우지 않으면 불안한 지경이다.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든 걸까? 연애할 때 두 시간 세 시간씩 통화하면서도 그 어떤 것에도 조바심 나지 않았던 나인데.. 이제는 사적인 통화가 1분이 넘어가면 불안하고 조바심 난다.
가득 채울수록 불안하다. 그리고 가득 채울수록 나 자신의 것들이 상실된다. 나의 많은 사람들과, 기억들과 추억들과, 현재 나의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 간다.
상실의 시대. 난 불치병에 걸렸다. 결국 나 자신조차 지워질 것이다.
하지만 다시 시작이다. 지워지지 않은 것들을 위하여. 나 자신의 끝나지 않은 삶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