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없는 무덤이 없듯 사연없는 물건은 없다. 게다가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듯. 물건을 보면 마음이 생긴다. 사고 싶은 마음, 계속 갖고 싶은 마음. 그래서 견물생심이 아니라,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방물충심(放物充心)
한자로 ‘방심’할 때 쓰는 ‘놓을 방(放)’자와 ‘충만’에 쓰는 ‘채울 충’자를 넣어, 물건을 놓아주고, 마음을 채우다라는 뜻. 물건을 비우려고 하면 추억과 사연이 떠올라 비울 수 없다는 정인님들께 내가 자주 해드리는 말이었다.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비우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보세요.'
아래는 방물충심을 매우 잘 하신 정인님들의 사연. 물건을 비우려면 사연이 떠올라 비울수가 없다면, 아래 선배들의 마음을 가이드 삼아 따라해보자. 비울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최선을 다했다"
- 지나가는 과객
“저는 소위 말하는 육아독립군입니다. 친정 부모님, 시댁 어른들 모두 멀리 살아요. 출산 하고 직장을 다녀야 했기에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큰 아이는 백일즈음부터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어요. 그때 어린이집 알림장으로 선생님과 아이의 상태, 생활, 재밌었던 일 등을 기록하면서 주고 받았는데, 정말 열심히 썼거든요. 거의 육아일기처럼 썼으니까요. 오랫동안 보지도 않고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알림장들을 꺼내놓고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데, 불현듯 ‘엄마가 이렇게 열심히 키웠으니 나한테 잘해야 해.’ 이런 마음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 편으로는 그때는 정말 나름 최선을 다해, 제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하면서 알림장들을 보내줍니다.”
어린이집 알림장에 대한 마음 한 켠에서는 어린아이를 두고 일터에 나가야 했던 미안함,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없이 워킹맘으로 치열했던 삶에 대한 보상 심리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과객님은 알림장을 비우기로 결심을 했고, 비움의 의미를 채웠다. 그 당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스스로를 다독여주었으며, 앞으로 아이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알림장들을 떠나보냈다. 물건 속에 깃든 마음을 잘 들여다 보고, 그 마음을 잘 어루만져 주면서, 미래의 결심까지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성장했어요"
- 꿈을현실로
"하나하나 사연없는 무덤이 없네요. 그 중 원아수첩. 동생이 태어나고, 처음 엄마와 떨어져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 5살 딸아이의 출석스티커가 왜 그렇게 대견하던지요. 그래서 가끔 들여다봤는데…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이 아니라 봄이 짙어져 여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장했어요.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떠나보내는 것이 아쉽지만은 않습니다."
꿈을현실로님은 원아수첩을 비우면서 ‘성장’에 대해 사유하셨다. "봄이 짙어져 여름이 되었다"는 표현에 울컥하기까지 했다. 지금 우리의 곁에, 수 많은 성장의 증거를 남겨온 아이가 바로 옆에 있다. 그 아이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고, 부모인 우리도 그들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응원하고, 사랑해줄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변화하고 싶다면 과거와 작별해야지."
- 생강향기
“아이가 만든 접시 허락받고 버립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없어도 된다’는 아이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어요. 그동안 물건 하나 버리려고 하면 온갖 잡생각이 들어서 버리려고 들었다가 도로 넣은 것도 많았거든요. 여유롭게 살고 싶으면서도 ‘추억이 있는 물건인데’ ‘언젠가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잘 버리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며.. 답답할 때도 많았는데, 오늘 쿨하게 버리라는 아이의 말에 ‘변화하고 싶다면 과거와 작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생강향기님의 말에 오랫동안 자신이 써왔던 일기를 비운 정인님이 생각이 났다. 일기를 비우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기를 비우는 것이 과거와 작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졌습니다”
과거의 물건을 비운다는 것은 '버리다' '끝'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채움' '시작'이란 메타포도 가지고 있다. 인생은 쉽사리 우리에게 여백을 허용하지도 않지만, 멈춰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문이 하나 닫혀야, 새로운 문이 열리고, 비움이 있어야 채움이 생긴다. 그러니 비움을 서글프게 생각하지 마시길.
내 비밀은 이런거야. 매우 간단한거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모자처럼 생긴, 코끼리를 잡아먹은 뱀을 가리키며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렇다, 맞다. 우리 삶에는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중요할 때가 훨씬 많다. 사랑, 용기, 희망, 자존감, 기쁨, 행복. 이런 가치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물건을 비우는 것도 마찬가지. 물건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물건의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다. 하지만 물건을 비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 우리가 자주 간과하고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여유와 자유? 혹은 앞서 사례로 든 세 명의 정인들처럼 자신에 대한 '위로', 앞으로의 '결심', '변화', 그리고 '성장'일 수도.
견물생심이 아니라, 방물충심.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는 물건을 방치 할때가 아니라, 물건을 비울 때만 오로지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