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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Jul 19. 2018

딸아이는 다시 학원.

이렇게  좋을 수 가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학원에 다니자고 다짐은 받아두었었다.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느라 숙제를 하느라 모두모두 바쁜 와중에 혼자 우두커니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들이 아이 스스로도 불안했을 것이다. 수학 문제 푸는데 예전보다 시간이 좀 걸려..라든지. 친구가 숙제 좀 도와달라며 풀어보라는데 예전 배운 진도인데도 기억이 잘 안 나 ..라든지. 가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불안감을 내비치곤 했으나 나는 애써 모른척했다.

 노는 게 지겨워질 때까지 참아주마.라는 나의 다짐을 지키기가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었는지 딸아이는 모를 것이다.

 여행을 다녀와 일주일간은 시차 적응하느라 고생을 해야 했으니 아직 때가 아니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오후 4-5시부터 깊은 잠에 빠져 새벽 1시쯤 깨어나곤 했으니. 그 시간에 일어나 "엄마 배고픈데.."하면 나는 밥통에 밥을 푸고 만들어두었던 반찬을 내주며 아주 늦은 저녁을 차려주었다.
 시차 적응은 나 또한 애매한 상태여서 이른 저녁에 3시간, 한밤에 3시간을 푹 자며 지내느라 하루가 둘로 쪼개진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새벽 2시에 자면 다시 새벽 5시쯤 일어나 딸아이 방에 간다. 그러면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동영상을 보거나 하며 놀고 있는 아이에게 다시 아침을 차려주고. 다시 한두 시간 후에 슬슬 샤워를 하고 딸아이가 학교에 가면 나는 너무 빨리 하루를 시작한 덕에 오후 3-4시쯤 혼수상태가 되어 있곤 했다. 그러면 또다시 이른 저녁 3시간을 자고 저녁 11시쯤엔 쌩쌩하게 일어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차 적응이 대략 2주 만에 말끔하게 정리가 되고. 나는 딸아이를 데리고 드디어 새로운 수학학원에 테스트를 보러 갔다. 그 학원은 내가 본 딸아이의 친구 중 가장 맘에 들었던 야무지고 차분해보이던 그 친구가 다닌다던 그 학원. 달리 정보도 없고 아는 곳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가 다니는 곳이니 정붙이기가 쉽지 않을까 해서 고른 곳이었다.
 테스트 날짜를 미리 인터넷으로 신청해두고 날짜가 다가올수록 딸아이는 아주 조금은 긴장이 되는 듯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잘 볼 수 있을까. 선행을 하긴 했는데 다 까먹어서 기억도 나질 않는데. 친구랑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차이가 나면 어떡하지.. 등등의 것.
 시험 바로 전날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전 수학학원의 교재들을 꺼내 슬쩍 수학공식들을 살펴보는 것 같기도 했다. 오호 기특한데. 라는 생각을 하고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갖고 싶은 이모티콘이 있다며 나를 바라보는 딸아이. 
 -시험 잘 보면 구매해줄게.
 -잘 보는 게 어떤 기준인데.
 -엄마가 생각하기에 이건 너무 비참하다... 할 정도만 아니면 돼. 혹시 들어갈 수 있는 반이 없을 수도 있고. 그럼 엄마가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그 기분으론 이모티콘이고 뭐고 울면서 집에 올지도 모르겠다...

 입을 삐쭉 내밀다가 할 말은 없었는지 다시 교재를 살피는 것 같더니 이내 10분도 안되어 잠들어 있었다. 

 드디어 테스트 날이 되어 학교 끝나면 바로 와야 해, 피곤하면 안 되니까 걸어오지 말고 버스 타고. 
 알았어 알았어 하며 딸아이는 학교에 갔고 약속대로 일찍 돌아와 대기 상태로 있었다. 
 테스트는 저녁 7시.
 뭐 좀 먹고 가야 하지 않을까. 배 안 고프다며 핸드폰만 만지고 있는 딸아이에게 교재라도 좀 보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이미 틀렸다는 답변과 함께 빈둥빈둥..
 벌써 8개월째 빈둥거리는 딸아이를 보는 애미 속이 30% 정도는 까맣게 타들어갔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 이따 보자.. 이모티콘 같은 거 다시는 못 사게 될지도 모른다. 이놈 자식아.

 학원에 도착하니 테스트를 보려 대기하는 학생들이 비슷비슷한 교복이나 생활복을 입고 대기 중이다. 구석 교실에 우르르 들어가 버린 뒤 남아있는 몇몇 엄마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브런치 글도 읽고 네이버도 기웃거리고. 한 시간 반의 시간이 주어지는 시험인데 한 시간쯤 지나니 슬슬 아이들이 시험지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다.
 나온 순서대로 프런트에 앉아계신 선생님께 시험지를 제출하고 바로 채점된 답안지를 앞에 놓고 아이와 엄마, 그리고 상담 선생님들의 상담이 시작되었다. 바로 곁에 있는 의자에 대기하고 있는 엄마들은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귀가 쫑긋해져서 힐끔거리며 아이와 엄마의 표정을 살피게 되는 상황.
 그나저나 우리 애는 왜 안 나올까. 배도 고플 텐데. 시험이 너무 어려운가..

 하나둘 아이들과 엄마들이 상담을 마치고 반을 정한 뒤 학원을 떠나가는데 나는 마지막까지 의자에 앉아 대기를 하고 있었다. 맨 마지막으로 시험지를 들고 나온 딸아이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망했어. 다섯 문제는 아예 못 풀었어..
-시간이 없었어..?
-아니.. 모르겠어.. 1학년 문제만 나온 것 같어.. 엄마가 선행한 거 다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시험을 망치고 나왔다는 딸아이의 어두운 표정에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럼 그렇지.. 그리 오래 놀았는데 생각 날게 뭐 있겠어.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멈추지 않는 한숨. 
 괜한 트집을 잡으며 엄마 탓이라는 딸아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가 엄마 탓이냐. 이놈 자식아.

 드디어 마지막으로 상담 선생님께 불려간 우리 모녀는 한마디로 잔뜩 쫄아있었다.
 반이 없으면 어떡하지. 들어갈 반이 없으면 어딜 알아봐야 하지. 친한 친구한테도 테스트 받으러 온다고 다 얘기해두었다고 했는데 이놈 자식 자존심 상해서 어떡하지. 좀 다그쳐서 일찍 학원에 데리고 올걸.. 아.. 나란 여자는 엄마 자격이...

 "시험을 잘 봤네요. 1학년 문제 거의 다 맞고요. 2학년 문제도 아주 어려운 심화 몇 개 빼고는 잘 풀었네요. 3학년 것도 꽤 풀었고.. 아. 틀린 것 중에도 보면 풀이해 놓은 것 보니까 마지막에 가서 좀 헷갈려 한 것 같아요. 
 월 수 금 반 중에 5시에서 7시 반 수업하는 이 반에 들어가면 맞을 것 같습니다. "

 아.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 뻔했다. 상담 선생님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렇게나 멋져 보일 수가. 수강료 따위 두 달이고 석 달이고 내겠어요. 정말 우리애가 시험을 잘 봤다고요.. 손을 덥석 잡고 빙글빙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
 방금까지도 시험을 망쳤다며 툴툴거리던 딸아이가 어색하게 삐죽거리며 옆에서 웃고 있다. 
 너 1학년 꺼만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근데 잘 풀었대~ 2학년, 3학년 문제도 있었대. 몰랐어? 어. 몰라도 상관없어. 잘 풀었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많이 잊어버리진 않았구나.

 바로 학원에 결재를 하고 내려와 기다리며 봐두었던 닭 한 마리 집에 들어갔다. 2인 세트를 시키면 닭 한 마리에 칼국수, 죽까지 만들어 준다던 그 집. 그래도 애써 시험을 보는데 결과야 어찌 나오던 애 좋아하는 닭고기는 좀 먹여줘야지 싶어 구슬픈 눈으로 찾아두었던 그 닭 집.
 시간은 이미 9시가 넘어 손님이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사장님~하며 애교를 부려가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맛있게 해주세요~. 우리애가 시험을 잘 봤다지 뭐예요~ 오호호호호. 하며 사장님을 붙잡고서라도 자랑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에게라도 밥을 사주고 싶은 기분. 그 식당에 누구라도 우리 말고 밥을 먹고 있는 일행이 있었다면 기꺼이 골든벨을 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모티콘 정도야 얼마든지. 당장 결제를 해주고 선물로 쏴주었다. 
 닭고기도 닭 다리, 날개는 다 건져서 아이 그릇에 올려주고. 칼국수에 죽까지 맛나게 끓여 많이먹어 많이먹어 그릇 가득 올려주었다. 아이 아빠에게도 카톡으로 소식을 알리고. 어디 더 자랑할 곳이 없나 찾아봤지만 뭐 이게 누구에게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아이가 학원에 다시 다닌다고 눈물 흘릴 일은 더더구나 아니어서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맘을 다잡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친구들 모두 달리고 있을 이 시기에 너무 오래 쉬고 있는 딸아이가 걱정되어 푹푹 꺼지는 한숨을 쉬며 산 시간이 8개월이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하다는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부터 지금까지 자그마치 8개월을 탱자 탱자 놀아젖힌 저 아이가 그 긴 시간을 만회하며 다시 또래 아이들 속으로 맞춰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가슴 타들어갔던 시간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합쳐봐야 6년의 시간인데. 똑같은 6년의 시간을 달려가야 할 또래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는 것 같았고 6년 중의 8개월은 너무나 긴 시간처럼 느껴져 나는 가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자괴감마저 느꼈었다. 못난 애미라 딸아이 앞길을 잘 헤쳐주지 못하는구나. 내가 끈기가 없어 이것 찔끔 저것 찔끔하며 살아왔으니. 날 닮아 뭘 해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못 달려가면 어쩌지. 나는 왜 그리 끈기가 없었지. 왜 한 번도 최선을 다해 달려본 적이 없나. 내 유전자가 딸아이의 몸속에 들어가 저리 늘어져있는 걸까.. 내 유전자.. 망할 유전자..




 며칠 전에 만난 지인은 성당에서 나이 많은 언니들의 조언을 가끔 듣는다는데 그중 뜨끔한 말이 있었다고 했다. 그 지인은 나와 비슷한 성향이라 딸아이를 좀 방목하며 기르는 쪽이었는데 그렇게 기르면서도 꽤 뚝심 있게 학원은 최대한 늦게 보내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류의 엄마였다. 이 지인의 교육관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이 많은 성당 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아이를 데리고 극성으로 키울 수도 있고. 내버려 두고 알아서 하렴하며 키울 수도 있다고. 본인도 첫째는 극성으로 키웠고, 둘째는 방목하며 키웠지만. 결론적으로 첫째는 잘 되었고 둘째는 좀 안 풀렸단다. 아이를 닦달하며 몰아세우라는 게 아니라. 엄마가 미리 여러 길을 알아보고 연구하며 정보를 꽤차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살살 달래며 바른길로 인도해야 하는 거라고.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네가 알아서 하렴하며 내버려 두면 아이 스스로도 굉장히 불안해하고. 알지 못하지 길을 찾지도 못한다고.
 아이를 데리고 외국에 나가 교육을 시킬 수도 있는데. 그럴 여건이 되면서도 하지 않는다는 건 엄마 본인이 겁이 나서 그런 건 아닌지 스스로를 잘 살펴보라고. 고생하기 무서워서, 영어를 못해서, 그럴 자신이 없어서 엄마 스스로 움츠러들면 아이는 그 이상의 어떤 길도 갈 수 없다며 엄마가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아. 뒤통수를 후려치시는 왕 언니의 말씀. 듣는 순간 뜨끔하다 했더니 내 지인도 뜨끔했다 한다. 속을 훤하게 들켜버린 것 같아 둘이 고개를 푹 숙였는데. 
 "그러니까 영어 공부 좀 우선 좀 해봐보세요.." 했더니
 "그러니까.." 하고. 
 "그래도 어떡해. 무서운데." 했더니
 "나도" 그러시길래. 
 "뭐래.."하며 둘이 한바탕 웃고 말았다. 



 어찌 됐든 아이는 다시 학원에 다니고 있다. 
 수학담임이시라며 전화가 왔길래 아이가 8개월이나 놀다 간 거거든요. 잘 부탁드립니다.를 거듭 말씀드렸더니 선생님도 좀 걱정이 되셨는지 처음엔 숙제를 좀 줄여서 내주다가 슬슬 조금씩 늘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예 감사합니다. 굽신굽신. 전화기를 들고 고개를 꾸벅꾸벅.
 숙제도 잘 해오고 수업시간에 엄청 집중한다며 며칠 뒤 칭찬의 전화를 다시 받았을 때 나는 또다시 흥분하여 아이를 붙들고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아이구. 우리 딸. 엄마 닮아 머리가 좋구나! 엄마가 아이큐는 좋았다더라고. 노오력의 등수는 그만큼이 못되었지만. 우리 딸은 서울대를 가자! 그리 오래 쉬었는데 이리 시험을 잘 봤으니 넌 수학의 귀재인 게 아닐까. 엄마는 너무 좋으다!"
 덩실거리는 엄마를 보며 쓸데없는 기대를 높여놨다고 고개를 젓는 딸아이.
 "엄마. 우리 반에 몇몇 애들은 고등학생 푸는 문제 풀어. .."
 제발 기대감을 높이지 말라는 딸아이의 말쯤이야 가볍게 무시하고 나는 한껏 맘이 부풀어 오른다.
 아. 서울대 가면 좋겠다. 학비도 싸고 학교도 넓고. 그럼 그 근처로 이사를 가야지. 어차피 어디에서 살든 무슨 상관이람. 

 며칠 학원에 다녀온 딸아이는 같은 반에 아는 아이가 여러 명 있다며 다행이라 했다. 
 친한 친구인 아이는 옆반이고. 중학교 같은 반 친구들도 여러 명 봤다며 좋아했는데.
 역시나 수학을 잘 하는 아이는 많고 많아서 그 윗반에도 같은 학교 친구들이 있다고 하고. 그 어려운 숙제를 만점 받는 아이들도 꽤 있다고 하며 은근 투지가 솟는 눈망울이다.
 
 상관없어. 상관없어. 누가 더 잘하고. 좀 못하고. 다 거기서 거기야. 그냥 지금 열심히 살고 있으면 되는 거지. 해야 할 일을 그러니까 본분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엄마는 그거로 대만족. 등급을 빨리 올려야 한다든지 선행을 많이 나가야 한다든지 그런 거는 상관없어. 그저 지금 오늘. 내 하루를 잘 보내고 있는 거라면 안심. 엄마는 거기까지만 바란다.
 
 다만. 서울대를 가 주면 참 좋긴 할텐데.
 다른 거는 없고. 
 학비가 싸다길래. 
 ㅎㅎㅎㅎㅎㅎㅎㅎ.
 (설마. 그럴 리가요)



 단아한 오늘의 점심. 
 깻잎전.
 뭘 먹어도 배부른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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