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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Sep 27. 2018

추석을 보내며

끝나니 좋군요.

 추석 연휴 전 밤늦게 재활용품을 들고 아파트 1층에 도착했을 때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택배 물건을 트럭 밖으로 집어던지고 있는 택배기사님을 봤다. 이내 '쿵'하며 떨어지는 물건들은 어두운 달빛에 슬쩍 보아도 무슨 무슨 백화점 로고가 씌어진 꽤 고가의 추석선물들 같았다.

 저 물건들 중에 분명 깨지거나 하는 것들이 있을 텐데 걱정이 되면서도 오죽 힘드시면 저럴까 싶어 못 본 척 지나가려는 찰나 나를 발견한 듯한 기사님의 한숨이 잠시 멈춰 있었다.

 종일 집에 있다가 바람이라도 쐬었다 들어오자 싶어 나온 참이라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던 나와 달리. 종일 산처럼 쌓인 택배를 배달하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는 그가 안쓰러웠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서 짐을 좀 내려드릴까요. 하고 싶은데 그게 그한테 도움이 될지, 민폐일지. 나는 과연 몇 개의 택배를 트럭에서 내릴 수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어 쉽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멀리 재활용품 모아놓는 곳에 차곡차곡 물건들을 정리하고 들어오려는데 기사님이 여전히 물건들을 트럭 밖으로 던지고 계시는 게 보였다. 

 어쩌나. 

 할 수 없이 조용히 뒤로 돌아 집에 들어와 있는데 오분도 안 되어 벨이 울려 나가보니 문 앞에 택배가 하나 도착해 있다.

  엘레베이터 앞 아직 내려가지 않은 기사님의 전화통화소리.

 "아주 지긋지긋해. 지긋지긋해 죽겠어.."

 죄인처럼 조용히 물건을 갖고 들어오는데 하필 무게가 잔뜩 나가는 사과박스여서 낑낑거리며 현관까지만 들여놓았다.



 이번 추석엔 이것저것 소소한 선물들이 배달되어 받아두었는데, 그중에 신랑의 동기회에서 보낸 것도 사과박스였고. 거래처에서 보낸 것도 사과, 배 박스. 또 어딘가에서 사과, 배. 하필 바로 며칠 전에 동네 사과 트럭 아저씨한테도 사과를 잔뜩 사서 쟁여 두었던 터라 냉장고에 보관할 장소가 없어 베란다에도 여기저기 올려두었다.


 고기 선물도 들어오고 홍삼도 들어오고. 요 며칠 전에는 화장품도 하나 받아 내게 쥐여주었었다. 이런 거 받아도 되는 건가 했더니 본인은 공인이 아니어서 괜찮다나 뭐라나 해서 뭐 공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했더니. 본인이 보내는 게 더 많다며 공짜 아니라고 하길래 뭐 그렇겠지 했다.

 추석 연휴엔 멀리 시골에 가야 하니 집안 정리도 좀 해두고 상가에 가서 뭐 좀 사 와야지 싶어 나가는 길에 제일 탐스러운 사과 하나랑 커다란 배 하나를 씻어 비닐에 담았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드문드문 초소가 있고 그 안에 온종일 바쁘신 아저씨가 한 분씩 앉아 일을 보시는데 어찌나 바쁘신지 며칠 전 맡겨두었다던 택배를 찾으러 찾아갔을 때 도저히 찾지를 못하시는 아저씨 옆에서 내가 스스로 찾아내어 일지를 쓰고 싸인을 하고 나왔다. 아저씨는 그 와중에도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의 질문에 답하랴, 놀이터에 두고 간 것 같아 갖고 왔다는 자전거 접수하랴, 실시간으로 울려대는 전화받으시랴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셨었다.

 초소문을 슬그머니 열어 오늘도 많이 바쁘신가 눈치를 보니 다행히 짬이 좀 나셨는지 서서 신문을 보고 계시길래. 아저씨 이거 드세요. 하고 얼른 문을 닫고 나왔다.

 급하게 따라 나오신 아저씨께서 몇 동에 사시냐고 자꾸 물어오시길래 조금 당황한 나는 이 동네 산다고만 자꾸 반복했는데 몇 동 사는지만 알려달라고 하셔서 슬그머니 몇 동이요 하고 대답을 하며 상가 쪽으로 돌아섰다. 찰나. 너무 감사하다고. 잘 먹겠다며 추석 잘 보내시라고 내 뒤통수에 덕담을 잔뜩 해주시는 통에 나는 좀 부끄러웠다. 

 아. 사과를 좀 많이 챙겨올걸.. 냉장고가 미어터지게 사과가 있는데. 내가 왜 한 알씩을 들고 나왔을까..



 추석 전날 시댁으로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며 화장품도 싸고. 홍삼도 싸고. 사과 한 박스도 보자기에 싸서 야무지게 묶어뒀는데. 냉장고 안에 별거 아닌 고기들이 맘에 걸려 슬쩍 신랑을 떠보았다.


 "고기도 챙겨갈까..?"

 뒤통수를 긁적이며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왜. 필요 없나.. 그럼 싸가든지." 하며 얼른 거드는 신랑의 대답에 그럼 그렇지. 필요가 없을 리가 있나. 우리 딸내미가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도 멸치 넣고 끓이는 된장보다 고기 넣고 끓이는 된장 좋아한다고.

 모른 척을 하며 주섬주섬 냉동고가 텅 비도록 아이스박스를 채웠다. 뭐 대단한 고기도 아니고 조그마한 불고기 거리랑 로스구이 팩을 담고. 보이는 김에 명란젓갈 얼려놓은 것도 담고. 사두었던 CJ 조리식품도 담고. 간식으로 먹으려던 송편도 담고. 주섬주섬 싸다 보니 박스가 그득이다. 

 남김없이 다 싸면 나 친정 갈 땐 빈손이겠네 싶으면서도 시댁은 시골이고, 또 시골 분들이라 그득그득 별거 아닌 물건들에 호강스럽다 하시니 그저 군말 없이 싸 담았다.



 평소와 별반 다름없는 명절을 보내며 절에도 다녀오고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어머님 해주시는 밥을 매끼 푸짐하게 먹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조카와 동서는 밝아 보였고 다같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를 반가워하는 어머님은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어 상에 올리셨다.


 집으로 떠나기 전날 식탁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와중에 아버님의 까다로운 입맛이 도마에 올려졌는데. 아버님은 예전부터 피자, 스파게티, 치킨 등을 좋아하시는 스타일이시라 오랫동안 식당을 해오시며 나름 음식에 자부심이 있는 어머님과 자주 마찰이 있어오셨다. 어머님은 당연히 본인이 손수 끓이는 된장찌개와 솥밥을 상에 올리시는데 그때마다 '맛없다'를 반복하며 어머님 속을 계속 긁으신다는 거다. 게다가 무슨 일본 가락국수 국물용 다시를 사 오셔서는 그걸 어머님이 만드시는 국에다가 타서 휘휘 저어 드시기도 하고. 맛있는 솥밥이 있는데도 햇반이 더 맛있다며 퍼 놓은 밥을 마다하고 햇반을 꺼내 데우신다니 어머님이 화가 나실 만도 하다.

 가끔 마트에 가셔서 장을 보실 때는 그 반조리, 완전 조리 식품들을 사자고 조르신다는데 요즘 유명한다는 바로 그 CJ 물건들이다. 만두, 장터국밥, 햇반, 떡갈비, 피자, 가락국수, 닭튀김, 등등 정말 없는 게 없는 그 달달한 음식들을 도대체 아버님은 어떻게 다 알게 되신 건지.

  몸에 나쁘고 값도 비싸니 드시지 말라는 어머님 말에 짜증은 물론 말씀까지 뾰족하게 하시며 어머님 자존심을 긁는다고 하시니 나도 더 이상은 말려도 소용이 없는 듯했다.


 설탕을 포대기로 사 드시는 아버님은 여든 넘으신 연세에도 정정하시고 건강하시다. 술도 못하시고 담배도 끊으셨다. 짜고 달고 매운 거 즐기시는 식성을 이제 와 어찌 바꿀 수도 없을 듯 싶어 어머님을 설득했다. 

 아버님을 너무 사랑하시는 게 아니냐. 세상 어느 남편보다도 훌륭하시지 않은가. CJ 완전 조리식품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시니 그걸 드시고 싶어 하시면 그걸 그냥 드리면 되지 않겠는가. 매끼 드시는 것도 아니니 본인이 원하시면 원하시는 걸 드시게 하시고 어머님은 어머님의 시간을 보내시라. 냉동고에 들어간 피자와 스파게티, 볶음밥을 즐기신다니 얼마나 바람직한 입맛이신건가. 복 받으신 거다.

라고 말하는 순간. 물론 어머님은 나를 째려보셨지만.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딸아이가 바로 그 순간. 

 "할머니, 요즘 엄마가 햇반 자주 줬어요. 반찬도 반찬가게에서 자주 사 와요. 우리는 이미 그렇게 먹고 있는데.."라며 해맑게 얘기하는 바람에 당황스러울 법한 상황이 되기도 했지만. 아뇨아뇨. 저 일 나가서 너무 바쁠 때만 그렇죠. 해먹여요. 암요. 어머니. 제가 돈 벌 때만요. 

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분의 툭탁거림을 보다 못한 신랑이 슬쩍 나한테 오더니 "니가 시켜드려 그냥. 그 햇반이랑 이것저것 해서 배달시켜 드리면 되잖아.." 하길래. 모른 척을 한 세 번쯤은 해보다가. 한 번 더 모른척하면 당연히 맘 상해하며 삐질 듯하여 잠 안 오는 새벽녘에 앱까지 깔아가며 반값 할인하는 온갖 냉동식품을 찾아 장바구니 담아 결제 버튼을 꾹 눌렀다.



 이거 한 번 보내면 이제 계속 보내달라 하실 텐데. 우리 시부모님의 다음 스텝을 모를 리가 없는 나인지라 세 번쯤은 버티며 모른 척을 했던 건데. 반값에 할인된 식품을 모아보니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아서 그냥 한 달에 한 번쯤이면 그냥 보내드리자...로 순순히 맘을 돌렸다.

 다만. 신랑의 맘을 한 번 떠볼까 싶어. 시부모님께 배달시킨 그 식품들을 비슷하게 주문하여 친정에도 보내드려야겠소~하며 주문하는 척을 해보자 "장인어른은 그런 거 안 좋아하시지 않아?" 하길래. 제대로 빈정이 상한 나는 결제 버튼을 꾸욱 눌러 친정에도 두 박스 정도 푸짐하게 물건을 보내드렸다.

 친정아버지는 위가 안 좋으셔서 음식에 예민한 편이시기도 하고 인스턴트를 별로 안 좋아하시긴 하다. 그걸 신랑도 알고 있고 마침 아무 생각 없이 그 얘기를 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이보게 자네. 명절이라고. 난 삼시 세끼 산 같은 설거지를 하고 있는 며느리이고. 이 와중에 그게 할 소리인가. 난 예민하다네. 명절 연휴 중 며느리에겐 각별히 말을 조심하시게.라는 뜻으로 앞으로 그 물건들을 시댁으로 보내라~ 하는 주문이 있을 때마다 나는 일부러 티를 내며 친정에도 같은 물건들을 보낼 예정이다. 째려보거나 원망하는 얼굴 아니고. 해맑게. 아무것도 몰라요~ 얼굴로. 해맑게.



 세상 참 좋아졌지. 연휴 기간에 주문한 물건들이 벌써 오늘 이틀 만에 도착했다는 문자와 전화를 받았다. 


 시부모님. 특히 아버님은 햇반 40개에 세상 감동하신 듯한 구구절절한 문자를 보내오셨고. 

 역시. 며느리 돈으로 산 햇반은 전혀 아깝지 않으신 시어머님은 '앞으로 아버님 CJ 식품은 니가 책임져라' 통보를 해오심에 이르렀다.

 친정부모님은 왜 이런 걸 보내느냐, 잘 먹겠다 고마워하셨는데. 

 생각해보니 시댁엔 그리 오랜 시간 해드리고 해드리고 살아왔으면서 친정에다는 뭘 보내드린 적이 별로 없었구나 싶어 가슴 한편이 시큰했다. 

 이런 빌어먹을. 신랑은 왜 본인 부모에게 잘해드리기를 바라고, 앞에서 애교 부리며 비위 맞춰드리는 걸 그리 뿌듯해하면서도. 왜 장인, 장모 앞에서 지는 안 하는데. 전화도 안 하잖아. 애교 없잖아. 뭐 보낸 적도 없잖아. ..라는 생각까지 이르렀다가. 역시나 항상 결론은. 그대는 모지란 인간. 그대는 모지란 사람. 그대는 한없이 모지르다.. 로 결론을 낸다. 



 연휴가 지나 시댁, 친정을 돌아 집에 돌아와 한바탕 대청소를 했다.


 딸아이 방에 설치했던 이동식에어컨도 창문에서 떼어내어 정리하고. 여름 옷도 한편에 모아 정리를 해두고. 3박 4일간의 빨래를 해치우고.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며 먼지를 닦아내었다.

 받아온 명절 음식들로 한 끼 해치우고 날이 너무 좋아 햇볕 쐬러 상가를 다녀오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곧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될 것 같다. 이번에는 몇 개월의 꽤 긴 시간을 일하게 된다.

 돈 벌어 양쪽 집에 CJ 냉동식품을 보내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나는 꼭 착한 일 하면 한 거만큼의 복이 들어오더라. 

 좀 더 주셔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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