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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Jun 06. 2021

말귀를 못 알아먹다

나는 바보인가


 지난번 일하러 갔을 때 좋게 봐주신 부장님이 다음 프로젝트도 함께 하자며 불러 주셔서 합류하게 되었다. 이번 일도 혼자 들어가나보다 했는데 일이 많아 한 명 더 요청을 하시길래 오래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언니를 추천해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20년 전쯤에 내가 신입으로 막 들어간 지점에 그때 이 언니는 최고 고참 언니였고 사수였다.

완벽주의 성격대로 꼼꼼히 일을 진행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직설적인 말투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나는 그때 정말 신입이라 그저 무서운 언니쯤으로 생각했지만 이래저래 세월이 흘러 지금 하는 일터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재회하게 되었었다.

이 선배와 함께 일을 하러 간다고 했을 때 이를 뜯어말리는 몇몇이 있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나를 말리던 몇몇은 이 선배와 예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이거나 이 분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팀에 합류하여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어차피 같은 일을 하게 된 입장으로 우리는 작은 한 팀이었다.

회사 경력이 나보다 훨씬 많고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본 입장으로 언니는 항상 아는 게 많았고 나는 나름 이 바닥의 선배로 아는 부분을 참고하시라 말씀도 드리면서 둘이 잘 조율하며 일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일이 진행될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첫 사건이 터졌다.

어떤 사안에 대해 내게 질문을 던지시길래. 아뇨, 저도 같은 경우가 있었는데 저는 저렇게 했어요.. 했더니.

아니. 여차여차해서 그런 건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 아니겠어.

음. 글쎄요. 나는 그렇게 생각되진 않은데. 부장님께 여쭤볼까요.. 하는 순간.

"너는 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냐!"


다들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 귀만 쫑긋 세워 일하고 있는 그 사람 많은 공간에서.

나는 평생 한 번은 들어봤었나 싶은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너는 왜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냐!"

내가 말귀를 못 알아먹었나. 나는 분명 대답을 했는데. 그 대답이 그분의 생각과 달라서 두 번 말씀을 드렸고. 그래도 수긍되지 않으시는 것 같길래 부장님께 확인을 하려는 찰나였다.

그리고 이어 식사 자리에서 재차 묻자 혼잣말하듯 "참 요령 없이 일하는구나 했다."



집에 와 새벽 4시까지 잠도 못 이루며 생각을 했다.

나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바보인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는 말을 성인이 성인한테 할 수는 있는 말인 건가.

성인이 아이한테는 써도 되는 말인가.

도대체 그 말을 상대방에게 어떤 의도로 내뱉는 건가.


그 사건이 그렇게 지나가는 듯 며칠이 흘렀지만 뒤이어 그런 상황은 두 번쯤 더 벌어졌다.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또 그런 뉘앙스.

선배는 뭔가 풀리지 않는 화면을 오랜 시간 들여 파악하다가 그 문제를 내게 잠깐의 시간으로 설명한 뒤 내가 잘 모르겠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했더니 또 그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을 텐데 마스크에 가려져 내 감정이 다 읽히진 않았던 모양이다.

부족한 설명에 추가 설명을 요청했던 건데 선배의 눈빛은 다시 그날이었다. 

너는 왜 말귀를 못 알아먹냐.

기분이 상한 나는 또다시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나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인가.


 세 번쯤 반복됐을 때는 좀 적응이 됐는지 처음처럼 맘이 상하진 않았지만. 

 참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날 뜯어말렸던 사람들의 조언을 새겨듣지 않았던 걸 잠시 후회도 했다. 하지만 내가 모셔온 분인데 내가 누굴 붙잡고 하소연을 하겠으며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 많은 이 선배에게 얘기해봤자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아 그저 앞으로 말을 줄이고 그저 수긍하는 쪽으로 답을 하자 맘을 바꿨다.

한번 입 밖으로 내 생각을 내질렀다가는 남은 기간 내내 불편한 사이가 될 것 같아 프로젝트 끝나는 시간까지 참기로 했다.



진짜 사건은 몇 주 뒤 터졌다.

개발자와 결함에 대해 대화를 하던 선배는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 때문에 약간 언성이 높아졌고, 이내 상황과 기분이 좋지 않았던 개발자가 대뜸 선배에게 한마디 던져버린 것이다.

하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그 말을 듣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선배는 본인은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며 들을 사람도 아니라며 엄청나게 격분했다. 부장님께도 저 개발자의 화면은 테스트하지 못하겠다 메일을 보냈고, 퇴근 후 술을 하며 남편에게 털어놨더니 그런 말 듣느니 당장 그만두고 나오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 개발자는 내몰리고 있던 상황에서 그날을 마지막으로 관두게 됐던 사람이었다. 아마 그래서 더 말이 심하게 나온 것 같다며 나는 선배를 달랬다. 무엇보다 그 말을 듣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아니까.


그날 저녁엔 나도 술 한 잔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철학을 고민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내게 직접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는 말을 했던 선배는 본인이 똑같은 말을 듣고 폭발하듯 화가 났다.

내게 그런 말을 한걸 잊어버린 걸까. 아예 인식을 못 하는 걸까.

아님 나는 그런 말을 들을만한 사람이고 본인은 그런 말을 들을 리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걸까.

도대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을 왜 주고받는 걸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는 나는 당신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또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 연을 끊자. .. 뭐 이 정도 상황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또 하나의 상황을 고백하자면.

그날도 어느 개발자 때문에 잔뜩 화가 난 선배가 화면을 열어 놓고 열을 올리며 짜증을 내길래.

"언니. 당 떨어져서 그래요. 내가 아침에 사 온 빵 먹고 일하자. 이거 먹고 진정 진정.. " 하며 대꾸를 했다가.

"너 그따위로 말할 거면 이 사람 거 니가 다 가져가! 나 진짜 농담 아냐. 니가 해! "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귀 쫑긋 일하고 있는 바로 그 사무실에서 말이다.

나는 정말 당황스럽고 기가 막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배를 바라보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내가 실수를 했나.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난 걸까. 도대체 내가 언제 뭘 건드린 거야.

이젠 예전처럼 화가 나진 않았다. 혼자 한숨 잠깐 쉬고.


"제가 할게요. 주세요. 선배가 건수도 많고 진행 잘 안되는 것들도 많고 하니 어차피 저 좀 나눠주셔야 해요. "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 결함 다 잡아 놨더니 이제 와서 지가 한 대!"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나도 뭔가 한마디쯤 하거나 같이 버럭 소리를 지를 만도 한데 나는 잘 참았다. 남은 기간이 2달이 넘고 여기는 귀 쫑긋 사무실이며 주위는 온통 개발자들이고 이 분은 나의 하늘 같은 선배였다.

그래도 내가 하겠다며 받아왔는데 한 시간쯤 지나 본인이 도로 하시겠다며, 나보고는 쉬운 걸 가져가라며 다른 부분을 떼어 주셨다.

그리고 항상 듣는 말은. 본인의 화면이 훨씬 중요하고 어렵다. 개발자들이 하필 이상한 사람들만 배정이 됐다였다.

근데 그 배정을 내가 한 게 아니고 선배가 하겠다며 가져가신 부분이었고, 개발자도 내가 배정을 했을 리는 없는 상황이다. 어려운 게 선배 쪽으로 갔다고 치자.. 해도. 나라고 왜 어려운 부분이 없겠는가 말이다. 나도 결함이 많고 이상한 화면이 많고 해서 어렵게 뚫고 있는데 저 말을 반복해서 듣고 있자니. 저 말도 함부로 할 말은 아니구나 싶었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어떻게든 그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생각을 했다.

선배는 일을 하는 데 있어 완벽주의 성격이라 진행이 잘 안되는 지금 상황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난 선배를 달래려고 하는 말들인데, 어느 알 수 없는 포인트에서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본인은 이렇게 하자고 제의를 했는데 내가 저렇게 하겠다고 대답해서 맘에 들지 않았다.

본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화가 난다.

선배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후배에게 짜증이 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 선배에게 상처를 줬던 걸까. 그래서 나 또 공격당하는 느낌인 걸까.


무수히 많은 밤을 생각으로 지새웠지만 결론이 제대로 난건 없고 또 다른 고민들만 무성했다.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이 선배를 추천해도 될까. 추천할 수 있을까.

다음 프로젝트에 또 같이 일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괜찮을까.

내가 이 고민을 털어놔도 될까.

털어놓으면 혹시 조금은 변할 수도 있을까.




네이버 직원의 자살 사건이 기사로 떴을 때 안타까운 맘이 들어 선배에게 얘기를 건넸더니.

과학고 나오고 서울대 나와서 평생 엘리트로 살았던 사람이라 상사가 하는 잔소리 그거에 못 참고 그렇게 된 거 아니냐며 엘리트 지상주의에 대해 비판을 시작하시길래. 아 이 분은 그 얼굴까지 공개되어 욕먹고 있는 그 상사에 빙의되시는구나 싶어 섬뜩했다.

과연 반백 살을 살아온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한다 한들 이 사람의 생각을 바뀌게 할 순 없겠구나 단념하게 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을 몇 가지 더 말하자면.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 선배의 설명은 부족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과 맞을 수는 없다.

맞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많은 사람이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고로 나는 말을 아끼고 깊이 고민하지 않으며 일에만 집중할 생각인데.

제발 새로운 어떤 상황에서 내가 격하게 흥분하여 되돌릴 수 없는 말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크게 흥분하여 속에 있는 걸 다 내뱉은 날이 온다면. 이후 그 사람과의 관계는 끝난다. 그 지경까지 간 거라면 내가 사과를 할 일도 없고 상대방의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다.



남은 기간 평화롭길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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