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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Aug 12. 2016

20년 전 내가 있었던 그곳

나의 사람들.


내가 최근에 좋아하기 시작한 어느 작가의 책 중에. 작가의 어린 시절과 다니던 학교, 살던 동네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작가가 살았던 고향은 내가 전혀 모르는 낯선 곳이었지만.

 작가가 다녔다는 학교는 왠지 낯설지 않았고 때론 너무 익숙해서. 혹시.. 설마.. 하는 맘에 조회를 해보니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분이었다.

 학번은 좀 차이가 나지만. 작가가 학교를 다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을 할 때쯤 내가 입학을 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학교의 풍경이나 그 주변의 동네들, 자주 갔다던 술집, 자취방 동네, 만화방까지.

  어딘줄 대충 알겠어요. 선배. 하며 실실 웃음이 났다.




'하루 2000원을 내면 밤새도록 만화를 볼 수 있었다던' 학교 앞 만화방은 골목으로 들어가 살짝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래된 2층 양옥집을 나름 개조해 1,2층 모든 벽마다 만화책이 가득 이였고. 내가 다닐 당시에는 3500원 정도 하는 음료수를 한잔 시키면 시간 무제한으로 만화책을 볼 수 있었다.

 신발을 벗고 마루를 밟고 들어가면 1층 부엌쯤의 위치에 음료나 라면 등을 파는 알바생이 있었다.

 음료수를 한잔 받아 들고 1층이든 2층이든 자유롭게 책을 골라 낡은 소파에 앉아 읽으면 그만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카페나 만화방에서 담배를 자유롭게 피우던 시절이라 구석구석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몇 시간씩 처박혀 읽다 배가 고파지면 1500원이던가 2000원 하던 라면을 사서 끼니도 해결했다.

 1층은 잘 기억이 안 나고. 2층엔 화장실이 있었는데. 들어가면 양옥 가정집의 화장실 구조 그대로여서 꼭 친구 집에 놀러 가 뒹굴거리며 노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소파가 빡빡히 들어찬 것은 아녔어서 몇몇은 소파에 앉아서 보고.

 몇몇은 바닥에 앉아 보기도 하고 창가에 기대 보기도 했었다.

 학교 앞에 있었던 그 장소를 나는 3학년쯤에야 처음 알게 되어 꽤 안타까우면서도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좋은 장소를 이제야.라는 안타까움과. 이곳은 이제 나의 아지트로군. 하는 설렘.

 참 여전히 철이 없던 대학생이었던 걸까.




 작가가 살았다던 자취방은 학교에서도 좀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거기까지 가려면 마을버스를 타고 좀 더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내가 가본 자취방은 학교 근처에 위치한 한 선배의 자취방이었는데.

 첫 자취방은 학교 근처 버스종점에 있는 오래된 건물 2층이었다.

 사람 사는 방이 아니라 사무실 한쪽에 공간을 얻어 누울 곳만 만든 곳이라 살기에는 좀 불편해 보였다.

 내가 이 종점을 거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라치면. 가끔 2층 창문에서 얼굴을 내밀고 "집에 가냐~?" 하며 버스 안에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밥 챙겨 먹고 내일 봐요.. 하며 손을 흔들어줬다.

 

 그 선배의 두 번째 자취방은 옥탑방이었고. 좁고 덥고, 또 추웠지만. 아늑하고 깨끗하고 신기했었다. 화장실 겸 샤워시설도 있었는데 계단을 아슬하게 건너 들어가야 해서 자칫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계단으로 구르기라도 하면 나체로 1층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구조였다.

 

 더워도 너무 더워서 한여름엔 자기 방에 들어가질 못하고 학교 강의실을 전전하던 선배가 다시 이사를 한 세 번째 자취방도 옥탑방이었는데.

 좀 더 넓고 마당도 훨씬 넓어져서 그만 우리 과의 과방처럼 온 선후배와 동기들이 쉴 새 없이 놀러 오는 아지트가 되고 말았다.

 선배는 제발 오지 말라며 애원을 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라면을 사들고 가 끓여먹곤 했다.

 고향에서 보내주셨다던 김치를 무척이나 아껴먹었는데. 역시나 우린 아랑곳하지 않고 퍼먹어서 금방 김치통이 바닥나 버렸다.

 김치가 떨어져서 바닥을 보이거나. 방을 어질러서 지저분해지면 선배는 진심으로 화를 냈었는데. 우린 갈 때마다 냉장고를 뒤지고 방을 어질렀다.

 




 작가의 글에서도 나오는 '규찰대'.

 사실 그 정확한 이름이 규찰대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런 게 분명 있었다.

 그건 학교 근처에 사는 자취생들이 서로 하고 싶어 하는 꿀알바였다. 저녁 11시부터 새벽 1시 정도에 손전등을 들고 두 명씩 짝을 이뤄 학교를 돌면 되는 거였는데. 운 좋게 규찰대를 하게 된 또 다른 선배는. 전날 있었던 야간 알바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고 그 얘기를 들으려고 과방에 모여 앉은 동기와 선후배들은 귀가 쫑긋했었다.

 그 흔히들 있는 학교 뒷산과 컴컴한 강의실. 어둑한 벤치에서 벌어지는 뜨겁고 야릇한 스토리들은 어디까지가 진짜였는지 잘 모르겠다.

 규찰대는 짭짤하기도 했었지만. 다른 이유로 더 인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년째 나가는 동문회가 있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를 입학한 사람들끼리의 모임인데. 20살 무렵부터 만나기 시작해 지금 20년이 넘어가지만 그 동문회를 나가면 우린 언제나 20살로 돌아간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선후배, 동기들이니 살던 동네도 비슷해서 사는 게 다 고만고만하고 비슷했다.

 대학 1학년이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사귀고 알던 모임들이 여럿 있었으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모임은 이것 하나뿐이다.

 학년이 올라가며 동기들은 군대를 가기도 했고. 그 안에서 연애를 하는 커플도 있었다.

 모임 장소는 항상 우리가 '다녔던 고등학교'근처 '살던 동네'의 술집이었다. 벌겋게 취해 술집을 나오면 길거리에서 교가를 부르기도 했고, 몇 명은 창피하다며 도망을 가기도 했다.

 2차를 가고. 노래방을 가고. 하나씩 집에 돌아갔지만. 끝까지 남아 항상 술을 마시던 멤버들은 항상 그 멤버들이었고. 끝까지 마시다 차비까지 탈탈 떨어지면 여학생을 한 명씩 집에 데려다주며 동네 순방을 했다.

 돈도 없었지만 버스도 이미 끊긴 그 시간에 한 명씩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새벽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기분이 또 센티해져서. 마지막에 남은 남자 선후배들은 '다니던 고등학교'에 우르르 몰려가 운동장에서 또 술판을 벌였다고 했다.

 

 동문회에 매년 새로운 후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나름 살뜰하게 챙기며 모임을 이어나갔지만. 언제부턴가 내 밑으로 한참 후배들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한 한 달쯤 전에 마지막 동문회를 했었다.

 이제는 다들 살기가 바빠 1년에 한 번 모이기도 쉽지 않다.

 그 20년의 시간 동안에도 꾸준히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간중간 군대에 가 없었던 사람도 있고. 유학을 갔던 사람도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사는 게 고달파져 한동안 소식이 끊긴 사람도 있었고. 아이를 낳고 사진만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나름의 사정으로 들쑥날쑥 나와도. 몇 년 만에 얼굴을 비춰도 우린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다시 20살의 그때로 돌아가 선배는 '오빠'나 '언니'이고. 동기는 여전히 철들지 않는 청년들이며. 후배는 누구누구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같이 시절을 보내며 연애를 했고, 군대를 보냈고.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왔으며. 서로의 결혼식에 몰려가고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축복해줬다.

 대부분이 애엄마이고 애아빠이며. 직장인이고 사회인이지만. 우린 다시 20살의 그때다.

 

  

 단지 변한 게 있다면. 이제는 그때처럼 2000원씩 3000원씩 걷어 술값을 챙기는 총무가 없어졌다는 점이랄까.

 싸구려 술집에서 싸구려 안주를 시켜놓고 키득거리던 애송이들은 없어졌다.

 강남의 어느 골목 안 중국집에 룸을 하나 빌려놓고 맛있는 요리를 줄줄이 시키며 소주와 맥주를 말았다.

 미래를 걱정하고 취업을 걱정하던 청년들은 이제 사는 얘기를 하며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축하하기도 한다.

 이제 세월이 더 흘러 나이가 들면 관광버스 빌려 다 같이 꽃구경 다니자는 누군가에 말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말 이렇게 계속 우리가 만나. 아무에게도 험한 일 없이 세월이 더 흘러. 다 같이 사는 얘기하며 여행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2차, 3차 없이 1차에 기분 좋게 마시고 모임은 끝난다.

 각자 얼마씩 돈을 모아 계산을 해도 차비가 있고 시간도 이르다.

 

 

 멀리 지방에서 온 사람 두 명이 기차를 타러 먼저 사라지고. 건강상의 문제로 술을 못 먹는 동기는 차를 갖고 떠났다.

 멀리 이사를 한 사람들은 가는 길 비슷한 이들끼리 전철을 타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우리가 살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다.

 시간도 아직 이르고. 버스도 다니고 차비도 있지만.

 우린 우르르 동네 순방을 했다. 한 명씩 한 명씩 '여학생'들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든든한 '남학생'들.

 마지막은 언제나 우리 동문회의 어여쁜 막내, 한때 모든 오빠들의 귀여운 여동생이자 혹은 누군가의 짝사랑이었을 이쁜 O주.

 (그녀는 30 후반을 바라보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나 아직 미혼이라 모든 오빠들의 안타까움,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결혼하라고 적극적으로 소개는 안 하는 듯)

 

 

 마지막 여학생을 집 앞에 데려다주고 이 듬직한 오빠들은 각자 집으로 잘 들어갔다며 늦게까지 카톡이 왔는데.

 어느 센티한 후배님이 새벽 2시가 넘어 우리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혼자 찾아가. 정문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렸다.

 그 시간에 거기서 뭐하냐고 다들 난리가 났는데.

 누군가 또 그 당시 우리의 사진을 찾아 찍어 올리는 바람에.

 정말이지 식은땀이 쭉 흘렀다. 


 

그 후배가 찍어보낸 사진인데.. 정문 모습이 바뀌었네요..
아. 저 모습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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